정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제시하며 정의란 무엇인지 우리 스스로 돌아보게 만들었던 마이클 샌델 교수가 이번에는 공정이라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쟁의 한 복판에서 평화를 외치고 기아가 심해질수록 풍요를 기원하듯, 정의와 공정에 대한 사회적 갈망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진 현시점에 두 권의 책이 대한민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것은 어찌 보면 이미 결정되어 있었던 일인 것처럼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공정하다는 착각은 능력주의를 비판한다. 내 능력으로 내가 이뤄냈고 그에 대한 합당한 결과물을 가져간다는 생각이 왜 문제인지 여러 사례와 근거를 들어가며 비판하고 있다.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가 옹호받는 이유를 크게 두 가지로 보았다. 효율성과 공정성이 바로 그것이다. 이 둘 가운데에서 공정성의 근거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능력에 따라 성취할 수 있고 그 성취의 크기에 따라 결과물을 얻어갈 수 있다는 생각은 결정론적 세계관이 아닌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신분제 사회처럼 모든 것이 결정되어있는 사회가 아니라 나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에 따라 우리의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갈 수 있다는 믿음과 희망, 그리고 인간이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는 자유 의지에 대한 갈망, 그 자유에 대한 옹호가 능력주의는 공정하다는 생각의 지지 바탕이 된다.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능력주의 사회에는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는 이 자유에 근거한 공정함이라는 근거가 너무도 단단하여 패자에게 강력한 책임이 부과된다. 모든 것은 너의 의지와 능력에 근거하기 때문에 실패 또한 너의 탓이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또한 인과론에 뿌리를 둔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 부는 노력(선)의 결과이고 가난은 나태(악)의 결과라는 것이다. 좋은 결과는 선한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고 능력에 따른 성취는 선한 결과라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성공과 실패를 도덕적 선악과 연결 지어 성취하지 못한 자들을 악으로 규정한다.
인과론에서 비롯되는 악함과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개인의 책임이라는, 능력주의를 지지하는 두 생각의 축이 만나 능력주의 세상의 기준에서는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은 타인에게도 스스로에게도 비난을 받게 된다. 이는 샌델 교수가 능력주의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 공동체주의를 약화시키는데 강력한 기여를 한다.
샌델 교수는 5번째 챕터 성공의 윤리에서 능력주의를 불완전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완벽하게 제거되면 그 완벽해진 능력주의는 과연 정의로운가 질문한다.
샌델 교수는 능력주의가 완벽해지려면 3가지 조건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첫째 공평한 기회의 제공, 둘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을 것, 셋째 능력에 맞는 성과가 분배될 것. 샌델 교수는 여러 이유로 이 세 가지 조건이 모두 완벽히 실행될 수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방해요인들마저 완벽하게 제거할 수 있다면 능력주의는 "정의"에 부합하는지 샌델 교수는 다시 한번 묻고 있다.
결과부터 이야기하자면 샌델 교수는 설령 그렇게 될 수 있다고 한들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 말한다. 그 이유는 조건이 완벽히 평등해지고 동등해진다고 하더라도 능력주의는 계층이동만큼은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한 평등을 보장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거지...?
이해력이 부족해서 그런지 샌델 교수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공산주의로 가자는 것인가?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들이 모인다는 하버드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세계의 지성으로 손꼽히는 교수의 논리를 완벽히 이해하기가 물론 어려울 수 있겠지만... 뭐가 문제인지는 알겠는데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도대체 모르겠다.
최연소 하버드대학 교수라는 타이틀만 보더라도 분명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배경에 힘입어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세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오피니언 리더이며 대학 교수라는 직함을 고려할 때 그가 이론가로서 이상을 제시하는 것은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현실과 너무 괴리되는 이야기 아닌가? 너무나 도덕적, 당위적으로만 접근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과 함께 실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왜 실현 가능성이 없는가
샌델 교수는 아마도 살아오며 악인을 만났던 적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세상은 악한 곳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악인으로 인해 내 삶이 직접적인 고통과 피해를 입는 경험을 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샌델 교수는 인간은 선한 존재이며 선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전제조건을 깔아 두고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인간은 악하다.
악하다는 것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 욕망을 실현시키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의미이다. 성취를 하면 할수록 인간의 욕망이나 본성은 새어 나오기 쉽다. 왜냐하면 두려움과 공포 같은 불확실성이 존재할 때 인간은 겸손해지며 성취는 이런 불확실성을 제거하여 내적 필터를 한 겹씩 벗겨내기 때문이다.
물론 타고나길 겸손하게 타고나는 사람도 있고, 훈련을 통해 겸손함을 획득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인간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인간 욕망의 기본 작동원리를 나는 그렇게 본다.
본인이 주로 교류하는 사람들의 집단이 어떤가에 따라 우리는 우리 주변을 달리 본다. 나쁜 남자만 만나온 여자는 남자는 다 쓰레기라고 말하고 된장녀만 만나본 남자는 여자는 다 허영 덩어리라고 말하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세상엔 훌륭하고 배울 점이 많은 이성이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선량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살아온 사람은 세상 사람들이 다 착한 줄 알고, 지옥불을 걸어온 사람들은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세상이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지 경험하기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군대다. 군대에 가는 순간 지금껏 내가 살아온 세상과 가치관에 거대한 혼란이 찾아온다. 일체의 필터링이 적용되지 않고 완벽에 가까운 이질 집단이 한 곳에 모여있는 조직이 바로 군대이다.
세상이 이토록 다양한 사람으로 가득 찬 곳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결코 인간이 선하고 선해질 수 있는 존재라는 가정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샌델은 아마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았거나 악인을 그의 삶 속 깊숙이 들여본 적 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책에는 승자들이 만약 "~을 인지한다면, 깨닫는다면, 알아차린다면"과 같은 표현을 많이 사용한다. 이것은 사회적 합의나 공동선의 추구를 전적으로 성취자들의 아량에 기대고 있는 것과 같다. 사회적 합의나 정의는 상위의 포지션에 위치한 사람들의 아량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기준에 기대서는 결코 이룩해 낼 수 없다. 성공한 사람들의 오만은 개인의 도덕성이 아니라 명문화된 법과 제도로만 정돈할 수 있다. 세종의 시대가 태평성대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태종이 엄격함을 통해 기반을 잘 닦아두었기 때문이다.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자면, 패자의 굴욕감을 줄여준다는 점에 있어서 이 책은 분명 의미가 있다. 지금 너의 처지는 네 탓만은 아니야, 너도 부모를 잘 만났다면, 가난하지 않았다면, 주변에 도와줄 사람만 있었다면 지금과는 달라졌을 거야. 이런 위로를 건넬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 완벽한 해결책은 아니다.
왜냐하면 정의와 분배와 같은 사회적 합의를 개인의 깨달음이나 단련에 의지하는 한, 승자들의 오만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제나 타자를 통해 자신을 인식한다. 승자의 오만이라는 외부의 조건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패자들의 정신수양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라 자기기만에 그치게 될 뿐이다.
이 책이 승자에겐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패자에게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자 힐링 팔이와 결합해 성취하지 못한 사람들의 회피 도구가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다. 예를 들면 "야 너 공정하다는 착각 안 읽었냐? 네가 이룬 게 다 니 힘으로 이룬 게 아니야~ 나도 너 정도 조건이었으면 그 정도는 해냈어~"와 같은 식의 자기변명의 도구로 분명히 어딘가에서 활용될 것만 같은 불길한 마음 말이다.
그렇게 말한다고 해서 무엇이 달라질까? 그런 말들은 개인의 삶을 변화시키는데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모두 자식이 잘 되기를 바란다. 왜 그럴까? 패자로써의 삶을 살아갈 때 짊어져야 할 짐들을 알기 때문이다. 승자가 되어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혀 내적으로 성숙한 사람을 만들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패자가 되어 공정하다는 착각을 읽으며 힐링 팔이를 하며 자기기만에 빠져있는 꼴은 보고 싶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세상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샌델 교수의 말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그것을 삶으로 실천하려 한다면 자신의 자녀들에게 공부나 성취에 대한 바람을 가질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샌델 교수의 말이 맞다면 성취한 사람들이 온전히 배려하고 이해하며 평화로운 시대가 언젠간 도래할 테니까. 하지만 절대로 그런 세상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자식이 성취의 길을 걸어가길 바라는 것 아닌가. 내 자식이 지위를 획득하고 세상을 바꿔나갈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은 바라더라도 지위를 얻지 못해서 세상이 바뀌기만 기다리게 하고 싶은 부모는 없을 테니 말이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 의문을 품고, 보다 나은 세상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고자 내딛는 시도는 언제나 옳다. 그러한 생각들과 새로운 방향으로의 한걸음으로 인해 세상이 진보한다는 믿음에 대해서도 반박할 여지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샌델의 주장은 분명 가치롭다.
다만 정말 이런 세상이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되길 바란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는 정책 입안자들과 같은 결정권자들의 변화를 촉구하는데 그쳐서는 안 된다. 본인 스스로도 한걸음을 내딛는 용기를 내어야만 한다. 그런 후에서야 세계의 진보를 입에 담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힘이 없고 영향력이 없으니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으면서 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변화를 이끌어주길 바라는 것은 능력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능력주의에 기대는 꼴이다.
예컨대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자는 메시지에 진심을 다해 동참하고자 한다면 기부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 그것도 한 달에 1~2만 원으로 생색내는 수준이 아닌, 내 소득분위를 파악하여 나의 월급에서 중위소득 100%의 월급을 뺀 금액을 기부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세상의 평균과 평등에 기여를 하는 셈일 테니 말이다.
또한 적금이나 보험을 당장 해지해야 하지 않을까? 은행과 보험사는 고객의 예치금으로 투자를 하여 그 성과를 이자로 지급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에 투자를 하는가, 성장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는 기업에 투자한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회사들이 사회적 기업이나 복지시설에 자금을 투입하리라고 생각할 수 없다. 다시 말해 보험이나 적금을 드는 행위는 능력주의 사회에서 만들어낸 시스템에 편승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능력주의 해체를 진정으로 외치고자 한다면 이런 시스템의 열매에서부터 자유로워야하지 않을까?
바로 이것이 우리가 능력주의를 극복해내기 가장 힘든 이유일 것이다. 시스템이 주는 달콤함과 안정감을 포기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이다. 체제의 열매는 받아먹으면서 체제를 비판하는 것은 자칫 우스워보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우리는 언제나 이상을 원하지만 내가 좀 손해보고 피곤해지는 것은 원치 않는다. 이것이 인간의 본성이며 이것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나의 현상이나 용어를 깊이 있게 해체하여 그것의 민낯을 샅샅이 드러내는 과정은 필요하다. 그래야 본질을 들여다볼 수 있고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까지 파악하며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계적 석학이라면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은 비범한 사람에게 맡겨두고 시대의 현인이라고 불릴 정도의 사람이라면 방향성을 제시해야만 한다. 그것이 진짜 어른이고 책임질 줄 아는 사람이다. 비난이 두려워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주욱 나열하는 것은 리더의 역할이 아니다.
이해하기에 믿을 것인지, 일단 믿어보며 시작할 것인지
이상이라는 것은 어쩌면 종교와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의 지성으로, 인간 이해의 범주로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그다음 단계에 대한 논의, 예를 들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능력주의를 극복한 어떠한 대안,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있을 것이며 우리는 그것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논리는 종교에서 신을 믿는 태도와 매우 유사하다.
돌이켜보니 나는 스스로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어야만 어떤 것을 받아들이려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아쉽게도 샌델은 그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있다. 일단 믿자, 그리하면 방법이 보일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도무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