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 속에 답이 있다

스피노자 따라 하기

by 정 호

가만히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다가 어떤 깨달음이 오는 순간이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돈오점수라 하며 극적인 깨달음, 순간적인 깨우침의 순간이라 정의한다. 돈오(순간적 깨달음) 이후에, 점수(점진적 수행)가 이뤄져야 하는지 점수(수행)의 결과로 돈오(깨달음)가 나타나는 것인지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어찌 되었건 공부와 깨달음의 관계는 단계가 있는 순차적인 과정이라기보다는 서로가 서로를 자극하는 끊임없는 상호작용의 결과라고 보는 편이 조금 더 적당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저마다 절대자의 존재를 정의하고 그 절대자의 가르침을 설파한다. 그 절대자는 주로 하느님, 예수님, 부처님, 알라신처럼 인간의 형상으로 각 종교의 경전에 등장하며 절대적 권능을 발휘한다. 하지만 절대적 존재라는 것은 이런 인간의 형상으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 자체라고 주장했던 철학자가 있다.


자연에 반하는 것은 이성에 반하는 것이며,
이성에 반하는 그 모든 것은 불합리하다
- 스피노자 -


그 인물은 바로 스피노자였다. 스피노자라고 하면 흔히 범신론을 떠올린다. 스피노자의 범신론이란 신은 어느 곳에나 존재한다는 의미이지만 그가 말하는 신은 여타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는 절대자 같은 개념이 아니다. 그보다는 자연을 자연되게 조율하는 어떤 자연적 본성이나 법칙 그 자체를 신이라고 규정하고 그런 절대적 법칙성을 가진 자연 규칙을 신적인 존재라고 말했다.


즉, 자연스러운 것, 자연스레 그렇게 되는 것들, 예외적이지 않은 어떤 흐름을 갖는 우주의 법칙들이 곧 신이라고 말했으며 그런 것들을 주로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에 스피노자는 자연이 곧 신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자연스러움 -> 이성적-> 합리적 -> 신(o)
부자연스러움 -> 비이성적 -> 비합리적 -> 신(×)


이 도식에 따르면 자연스러운 것은 이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언제나 완전무결해야 하는 신적 개념에 가까워질 수 있고,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비이성과 비합리적이기 때문에 언제나 완벽해야 할 신적 개념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스피노자의 철학까지는 자세히 모르겠지만 살다 보면 자연현상 속에서 생을 관통하는 어떤 철학적 깨달음을 불현듯 느끼게 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늘 반복되는 계절의 변화이지만 어느 순간 무심코 그 안에서 인생의 희로애락과 기승전결의 흐름을 깨닫고는 갑자기 새옹지마라는 글귀가 남은 인생의 주요 모토가 되기도 하고, 평소에는 인지하지도 못했던 그림자가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오며 빛과 그림자라는 자연현상 속에서 빈부 격차나 자유와 평등처럼, 모순되지만 항상 함께 서로 묶여 굴러갈 수밖에 없는 인생의 특정한 진실을 마주하게 되기도 하는 것처럼.


이런 순간들과 마주할 때면 자연이 우리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신적 존재라는 말에 일견 수긍이 간다. 종교를 믿음의 문제라고 정의 내려야 한다면 어떤 신에게 나의 삶과 마음을 의탁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내 선택에 달려있는 문제일 테다. 자연물을 통해 성찰을 가져가려는 자세 역시도 하나의 선택이라고 한다면 이것 역시 어떤 종교적 자세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냥 잡상에 잠기기 좋아하는 성향과 혼자만의 의미부여로 끝나고 마는 생각의 꼬리물기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삶의 의미란 언제나 스스로 부여해야만 하고 혼자서 찾아가는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이런 것은 이런 것대로 또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내 인생의 의미 한 줄을 문득 발견하도록 도움을 주는 모든 현상들에 감사와 경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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