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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ug 20. 2021

즐거움과 두려움이 함께 해야 모험이다

1%와 51% 그리고 100%

어린 시절엔 참 설레는 일이 많았다.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시간, 만화영화 방송 시간에 맞춰 TV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던 기억, 방학하는 날 선생님께 인사를 하고 교실을 뛰쳐나가면서 느꼈던 설레는 기분, 이런 기대감과 설렘의 감정적 근원은 즐거움이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모험이라고 하기엔, 그리고 이런 마음을 모험심이라고 하기엔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어린이 만화나 동화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테마는 "모험"이다. 모험심이 강한 주인공이 모험의 여정을 통해 성장하는 이야기.


아이들의 성장에 있어 모험은 가장 효과적이고 필수적인 장치임이 틀림없다. 수많은 역경과 고난을 겪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는 과정에서 깨닫는 수많은 감정과 지식, 그리고 우정과 사랑. 삶을 살아가며 느낄 수 있는, 혹은 느껴야만 하는 것들이 모두 집약되어 있는 것이 모험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모험이란 무엇일까.


마냥 기쁘고 즐겁기만 한 것을 모험이라 할 수 있을까? 그저 설렘의 감정만 충만하게 차오른다면 우리는 그것을 모험심이 발동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일까?


모험이라고 하면 가장 쉽게 여행을 떠올릴 것 같다. 그렇다면 여행은 왜 모험이 되는가. 여행을 떠날 때의 우리의 감정, 그리고 여행지에서 우리가 마주할 수 있는 단어들을 떠올려보자.


여행은 낯설고 비일상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다. 낯설기에 불편하고 예측 불가능하기에 두렵다. 일상에서 벗어난 장소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신선하지만 그와 동시에 경계심이 발동한다. 


하지만 이런 걱정거리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행을 감행하는 이유는 걱정거리보다 조금은 더 큰 즐거움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는데에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환경이 나에게 주는 새로운 영감과 이질적인 감정들, 여행을 오지 않았다면 평생을 모르고 살았을 새로운 세상에 대한 경탄과 경외감. 이런 즐거움을 떠올릴 때 걱정거리는 여전히 그곳에 존재할 테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것에 시선을 두지 않는다. 


모험은
즐거움과 두려움이 적당히 섞여있는 것


즐겁기만 하거나 두렵기만 한 것은 모험이 아니다. 즐겁기만 하다면 묘한 흥분감과 설렘은 나타나지 않는다. 반대로 두려움만 있다면 그것은 공포에 가까울 것이다. 즐겁지만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한 것, 이질적인 두 가지 감정이 서로 섞여 들어가며 만들어내는 설레는 기쁨, 그것이 모험이다.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에게 고백하는 일은 모험이 아니다. 그것은 즐거움은 있지만 두려움은 제로에 가깝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대에게 고백하는 일은 모험이다. 거절의 두려움이 있지만 두근거리는 설렘이 공존하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두려움의 비율이 어느 정도 되어야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 비율은 9:1일 수도 1:9 일수도 있을 테지만 즐거움의 비율이 두려움의 비율보다 조금은 더 높은 편이 좋아 보인다. 그래야만 모험을 통해 얻게 되는 긍정적 효과들이 그다음 모험을 또 다시 추진하도록 할 테니 말이다.


한석규는 넘버 3에서 자신을 얼만큼 사랑하느냔 애인의 질문에 51%만큼 믿는다고 말한다. 여자 친구는 왜 100%가 아니고 51%냐며 뾰로통해 하지만 그런 여자 친구에게 한석규는  51%를 믿는다는 건 100%를 믿는 것이라 답한다.


51%를 믿는다는 것이 어떻게
100%를 믿는다는 말이 될 수 있을까


단순히 수치상으로만 보았을 때 이는 성립하지 않는 등식이다. 하지만 모험의 측면에서 생각해보니 이는 정확히 들어맞는 말이다.


모험에는 결코 100%의 즐거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51%의 즐거움과 49%의 두려움이 존재하는 것이 모험의 본성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그 모험을 성공적으로 완수해 낸다면 그것은 100% 완벽한 모험이 되고 즐거움이 된다.


51% 사랑한다는 한석규의 말은 잠재적 불안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너를 끌어안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모험 역시 그러하다. 잠재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존재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쁨과 설렘이 조금이라도 더 커 보인다면 기꺼이 그 불안감을  감수할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그리고 그 51%의 믿음은 결국 모험 속으로 우리를 밀어넣고야 만다. 그것은 결국 행동을 촉발시킨다. 어떤 일이 발생하는 것을 100%, 발생하지 않는 것을 0%라고 정의한다면 51%의 믿음은 결국 100%의 행함을 이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51%를 믿는다는 말은 결국 100% 믿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 된다.  


모험은 언제까지 모험일 수 있을까. 두려움이나 기쁨 어느 한쪽이 완벽히 사라지게 되는 순간 모험은 더 이상 모험이 아닌 것이 되고 만다. 우리는 어떤 모험을 하고 있는가. 어떤 모험을 해야 하는가. 1%라도 설레는 일이 있다면 발을 담가보는 것은 어떨까. 자주 보면 정든다는 말처럼 1%의 설렘이 51%가 되는 순간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올지도 모르는 일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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