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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07. 2021

잘게 쪼개어진 세상

각자도생의 위험성

"카카오 뷰? 이거 뭐지?"


국민어플 카카오톡은 업데이트를 통해 "카카오 뷰"라는 서비스를 새롭게 선보였다. 이는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개인이 구독하는 형식의 서비스인데 요즘 대세인 유튜브나 각종 SNS의 흐름을 따라 개인의 취향에 맞는 콘텐츠를 제공한다는 것을 콘셉트로 잡은듯해 보인다.  


이것을 보면서 세상이 더 잘게 쪼개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화면에 통째로 정보를 띄워 뉴스를 전달하던 포털 방식에서 벗어나, 범주를 나누는 것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유명 인플루언서들이 추천하고 그들의 입맛에 맞는 채널로 구성된 채널들 가운데에서 우리가 원하는 정보를 찾아야 하는 세상이 왔다.


기존의 매체가 누군가의 선택에 의해서 정보를 배치하여 전달한다는데 있어서는 이미 정보의 불균형이나 편집된 정보를 부분적으로 습득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 있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거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제는 아예 검증되지 않은 인플루언서들이 채널에 한 챕터를 차지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을 좋은 쪽으로 본다면 개인들이 얼마든지 정보의 주체가 되어 생산자의 입장에 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생각해 본다면 검증되지 않은 무수한 개인들이 만들어 내는 편협할 수밖에 없는 조각난 세상 속을 헤엄쳐야 한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다품종 소량 생산이라는 말은 얼마든지 좋게 받아들일 수 있다. 상당한 긍정적인 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우려되는 점이 하나 있다면 파편화된 개인을 넘어서 미세먼지 수준으로 부스러져 흩날리는 개인들이 될까 두렵다.


어그로를 끌어 팔로워를 늘리려는 인플루언서들이나 대형 플랫폼에서 이런 인플루언서들에게 한 자리를 버젓이 내어주며 채널을 개설하여 운영하게 만드는 점, 그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라는 옛 광고 카피가 생각난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만 따라와라. 나와 의견이 다른 사람들은 굳이 내 채널을 구독하지 말아라. 내 생각에 대해서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니 원치 않는다면 다른 곳에 가서 놀아라. 이런 식의 이야기는 나와 다른 사람들에 대한 무제한적 배타성을 드러내는 것에 다름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되는 우물을 파는 것을 무슨 수로 제지할 수 있을 것인가. 문제는 리딩 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것을 따라가고 있는 보통의 개인들이다.


개인들에게 이것은 왜 문제가 되는가


예전에는 볼거리 즐길거리가 다양하지 않았다.

TV 프로그램이라던지, 유행하는 몇 권의 책이라던지,

그 시대의 시대정신이라던지 하는 것들에 대해서 공통적으로 관심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볼거리를 즐길거리 온갖 놀거리가 넘쳐나 거의 모든 사람들의 성향과 취향에 정확히 적용시킬만한 놀이 거리들이 다양하게 등장함으로 인해 개인은 자신의 색깔과 성향을 보다 더 정확히 찾아갈 수 있게 되었다. 그와 동시에 다양성과 개성을 기반으로 하여 개인들은 무수히 작은 단위로 쪼개어져 나간다.


이것은 나와 다른 사람을 점차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나와 공통점이 있는 사람의 숫자가 절대적으로 적어지고, 수가 적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현실 세계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마주할 수 있는 횟수가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실에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마주할 기회가 적어진 사람에게 나와 다른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기대하기란 어려운 법이다. 다름을 이해하려면 같음에서 비롯되는 공감이 먼저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같음을 알지 못하는데 다름을 논하는 것은 순서가 맞지 않다.


혹자는 온라인을 바탕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과 더욱 교류가 쉬워졌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온라인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다. 실제 많은 온라인상의 교류가 오프라인으로 이어지기도 하니 말이다. 다만 그런 긍정적인 부분의 반대편에는 취향과 개성이라는 긍정적 용어 뒤에 숨어있는 역기능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우리는 어쩌면 개성의 발현이나 소확행이라는, 누가 들어도 긍정할 수 있는 몇몇 단어 뒤에 안전하게 숨어 개인의 파편화를 유도하는 큰 흐름을 인지해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개인들 각자가 외딴섬으로 들어가고 있는지도 모른 채 각자의 섬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광장으로 나와야만
나와 다른 존재들과 직면할 수 있다.


동굴 안에서는 나의 생각을 더욱 정교하게 다듬고, 깊이감을 만들어 내어 나와 뜻을 함께하는 동지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확장과 변화는 결코 이뤄낼 수 없다. 세계의 확장과 진화는 언제나 부딪침을 통해 탄생하기 때문이다. 더욱 잘게 쪼개어지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늘 어딘가 연결되어 있을 곳을 찾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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