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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18. 2020

같은 곳에 서 있을 때   

인간의 본능에 근거한 관계의 비밀

남녀 각각 10명이 자신의 이마에
1부터 10까지의 숫자 중 하나를 붙이고
짝을 찾아야 하는 실험이 있다.


실험의 조건은 두 가지.


첫째. 가능한 높은 숫자를 가진 이성과 맺어질 것. 둘째. 자신의 숫자는 알지 못한다.


실험이 시작되자 남녀 모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8, 9, 10점대의 이성을 향해 돌진한다. 실험 초반 참가자들은 자신의 점수를 모르는 상태에서 일단 높은 점수를 가진 이성에게 어필하기 시작한다. 한데 높은 점수의 참가자들은 자신들이 짝을 찾기 위해 노력하기도 전에 자신에게 많은 수의 이성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고 자신이 높은 점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것은 높은 점수를 가진 사람들에게 선택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한다. 그들은 자신에게 다가온 이성의 점수를 바라보며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들 중 가장 높은 점수를 가진 이성을 선택한다. 약간의 변수가 있겠으나 8,9,10점의 이성들은 탐색의 시간을 거쳐 자신과 비슷한 점수대의 이성과 맺어진다.


초반의 급격한 파트너 결정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된 후 7점 이하의 참가자들은 남아있는 이성들의 점수를 바라보며 다시금 고민하기 시작한다. 나는 몇 점일까. 이미 상위 점수의 이성들은 모두 짝을 만나 만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조바심이 난다. 남아있는 이성 가운데에서 높은 점수의 이성에게 빨리 다가가야 한다. 어떤 사람은 7점은 경쟁률이 높을 테니 조금 눈을 낮춰 6점이나 5점인 이성을 공략하기로 한다. 1,2,3점보단 그게 나은 선택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잠시 동안의 눈치 게임이 마무리된 뒤, 초반 결정전과 비슷한 형태로 소강상태에 접어든다. 4,5,6,7점의 번호표를 부착하고 있던 남녀는 마찬가지로 자기의 번호에서 플러스 마이너스 1~2점 사이에 있는 이성과 맺어지게 되고 완벽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만족감과 안심을 얻은 뒤 남은 게임을 지켜보게 된다.


남아있는 1,2,3점의 번호를 부착한 사람들은 이미 표정이 좋지 않다. 남아있는 상대방의 점수가 매우 낮다는 것을 서로가 이미 알고 있으며 1차, 2차의 결정전이 진행되는 동안 무수히 많은 거절의 경험 때문에 기분이 나빠질 대로 나빠졌기 때문이다. 한숨을 쉬며 마지못해 남아있는 이성 중 그나마 높은 점수인 3점을 선택하려고 발걸음을 옮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쪽에서는 1점이나 2점이나 3점이 무슨 의미가 있냐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그저 가만히 서있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기분이 나빠 더 이상 실험에 참여하지 못하겠다며 자리를 이탈하기도 한다.  


이미 예상했겠지만 이 실험에서 이마에 붙은 숫자는 개인의 조건을 상징한다. 조건이라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능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외모, 성격, 가치관, 비전, 학벌, 집안, 직업, 매력 등 개인을 감싸고 있는 여러 가지 지표를 의미한다.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것들에 점수를 매긴다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 일이며 가능한 일인가 의문을 품을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변수를 고려하지 못한 실험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겠으나 이 실험은 명백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은 우등한 존재와 맺어지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그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것과 어느 정도 관련성이 있다는 점이다.

 

사기꾼이 넘쳐나고 나서야 사기꾼에 대한 대처법이 시장에 나돌고, 주가지수가 꼭지를 찍었을 때 사람들은 그제야 주식 이야기를 꽃피우듯, 수많은 책과 격언들이 자만심을 경계하고 겸손하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하는 것, 영화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토리텔링 속에서 오만함을 악으로 규정짓는 것은 그만큼 인간이 본디 겸손과는 거리가 멀고 오만한 존재라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 인간은 본디 우월해지고 싶어 하는 존재이다. 우월함은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얼마큼인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영향력이라는 것은 나의 세계관, 나의 가치관이 타인에게 얼마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여러 종류의 권력에서 비롯된다. 권력이란 사회적 지위일 수도, 남들보다 뛰어난 지력일 수도, 도덕적인 무결함일 수도, 빼어난 외모일 수도 있다. 즉 사람들이 갖추고 싶어 하지만 갖추기 어려운 어떤 것을 갖추었을 때 권력은 형성되고 그것은 인간에게 우월하다는 느낌을 가져다주며 그것은 자아실현의 도구가 된다.   


우월함이 자아실현의 도구가 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세계가 점점 단단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이 단단해진 내면의 세계를 외부의 세계와 연결시키고 싶어 한다. 아니 연결시킨다기보다 나의 세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래서 인간의 세계에서는 갈등이 멈출 수 없다. 자신의 세계가 맞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하는 개인들이 끊임없이 부딪히기 때문이다. 홉스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파악하여 자연 상태에서 인간의 행동양식을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라고 이야기하였으며 이것은 성악설과 사회 계약설의 근거가 되었다.


나와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기 힘든 이유는 내가 그간 쌓아온 나의 세계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나의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가 제한되었다고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우리의 세상은 타인의 의견과 나의 의견을 조율해 나가기가 어려운 것이다. 서로의 이익을 확장시켜 주는 비즈니스의 세계에서는 이것이 가능할지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관계에서는 약육강식의 섭리가 적용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외로워진다. 공고해진 나의 세계관은 나와 다른 세계를 만났을 때 불편함을 느끼게 되고 나의 세계를 빠르고 강력하게 구축한 사람일수록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서 불편함을 느끼는 빈도가 잦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거의 모두가 다르며 아주 일부분만 서로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치하는 부분보다는 불일치하는 부분이 먼저 보이고 많이 보인다.


이것은 새로운 사람을 만났을 때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기존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래서 우리는 성장하며 가까운 사람들과 하나둘 멀어진다. 헤어짐의 대상은 때때로 가족이나, 가장 친했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전 세계의 국가들이 끊임없이 영토확장을 위해 쉬지 않고 전쟁을 해온 이유 역시, 위로 위로 올라가다 보면 지배자가 자신의 우월함을 확인하기 위한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노비는 평민이 되고 싶고, 평민은 귀족이 되고 싶으며, 귀족은 왕이 되고 싶고 왕은 황제가 되고 싶은 법이다. 미국 대통령이 세계 대통령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우습지만은 않게 들리는 것은 우리의 무의식 속에 약육강식의 논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분과 계급이 사라진 이후에도 이러한 근본적인 인간의 속성은 변하지 않았다. 만족은 어렵고 우리는 항상 더 나은 미래, 더 상위의 무엇인가를 꿈꾸며 살아간다. 이것은 삶의 동력이 되어주면서 동시에 삶을 고통스럽게 만든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말.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무슨 말인지도 제대로 몰랐으면서 아하! 그렇구나! 라며 무언가 깨달은 체했던 것이 기억난다. 마주 본다는 것은 무엇이고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마주 본다는 것은 아마도 서로만을 바라본다는 뜻일 테다. 그것은 정열적인 행위로 비치고 현재에 충실하다는 뜻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너만 있으면 된다는 로맨틱의 극치일 수도, 세상에 너와 나만 존재한다는 듯한 몰입감을 주는 언어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주 본다는 것을 조금 달리 생각해 보면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한 사람만 기울어져도 마주 보는 것이 어려워질지도 모를 일이며 자칫 둘만의 현재에 매몰되어 인생의 여러 길들을 바라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낭만적이지만 왠지 모를 씁쓸함이 뒤따르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것은 어떨까?

왜 마주 보는 것보다 같은 곳을 바라본다는 말에 사람들은 더욱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까.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겠지만 이곳에서는 그 이유를 밝히기보다 문장을 조금 바꾸는데 초점을 두고 싶다.


사랑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아니, 나는 그보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은 같은 곳에 서 있는 일이다.


사랑은 같은 곳에 발 디디고 서있는 것.


마주 보느냐 같은 곳을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는 것이다.


모래사장에서 본 바다, 산 중턱에서 본 바다, 비행기에서 바라본 바다는 모두 다르다.

같은 바다를 바라보면서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한다면 그 관계는 오래 유지되기 힘들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에 근거한다면 인간은 모두 자신의 세계를 확장하고 싶은 욕구가 존재하기에 서로 다른 곳에 서서 이야기하는 타인을 이해하기보다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이해시키려 들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다.


하지만 같은 곳에 서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서로 잠시 다른 것을 바라보고 있더라도 같은 곳에 서있기 때문에 고개만 돌리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금세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위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굳이 나의 세계를 덧씌워가며 확장시키려 노력하지 않아도 나와 세계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에 이미 편안함과 동지애를 느끼게 된다. 확장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확장해 나가는데 보탬이 되는 동지로 느껴지는 것이다. 우리는 그제야 상대방을 설득하는 것을 멈춘다.


미우라 켄타로 작가의 베르세르크에 등장하는 그리피스라는 인물은 친구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나와 대등한 자"라는 답을 내놓는다. 다소 유치한 사춘기 청소년스러운 감상이 섞인 대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이것은 어찌 보면 인생의 정답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


등하다는 것은 경제력, 학벌, 지적능력, 직업 등이 비슷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대등하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너와 내가 전혀 다른 인간이지만 너의 그것만큼은 인정할만하다는 존경의 마음.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인정하는 부분이 있을 때에만 대등한 관계가 형성되며 유지될 수 있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다. 같은 곳에 서 있을 때에만 같은 무리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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