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 호 Dec 25. 2021

말의 맥락, 말의 힘

권위를 세울 것인가 비웃음을 살 것인가  

말이라는 것은 참 복잡하고 신기하다. 언어적 표현은 거의 모든 순간 반대의 언어에 의해 반박이 가능하다. 예를 들면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은 "가까운 이웃이 먼 친척보다 낫다"라는 말로 반박할 수 있다. 대부분의 말이 이처럼 명확히 반대되는 말로 반박 혹은 대체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삶이 다채롭고, 그렇기 때문에 늘 충돌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런 모순적인 특징 말고도 언어라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특성이 하나 더 있다. 그것은 바로 상황 맥락에 따라 너무도 다른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모순적 언어가 서로 다른 언어 간의 무한한 대치를 의미한다고 한다면 상황 맥락에 따른 언어는 같은 언어의 무한한 변주라고 할 수 있겠다.


말은 말 그 자체로 정의되지 않는다.


"사랑한다"라는 말을 한번 생각해보자. 사랑해라는 말이 우리의 입을 통해 발화되는 순간은 언제인가. 우리의 한정적인 경험과 부족한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해보자.


연인에게 품고 있는 터질듯한 내 가슴속 불덩이 같은 설렘과 그리움의 감정을 상대방이 알아주었으면 하는 마음에 사랑한다고 말을 할 수 있다. 내 모든 것을 헌신하고 희생하더라도 자식에게 좋은 것을 전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도 우리는 사랑이라고 표현한다. 부모의 그런 마음을 깨닫고 감사와 후회의 감정이 섞여 뒤늦게라도 부모에게 보은 하고자 하는 자식의 마음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언어의 다의적 개념성이다. 다의적이라는 말은 뜻이 여럿이라는 의미이다. 세밀하게 들여다보면 미세한 차이가 있지만 큰 틀에서는 비슷한 방향성을 가지고 있는 언어의 형태. 그래서 언어는 같은 단어와 같은 표현이라고 할지라도 상황에 따라 미세한 의미의 차이가 존재한다.


하지만 같은 사랑이라는 말도 전혀 다른 의미로 사용될 때가 있다. 스토커가 잡혀 경찰 조사에서 털어놓는 범죄의 원인을 "사랑했기 때문이야"라고 말한다거나 아동학대 가해자나 성범죄자들의 입에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말은 앞에서 말한 연인에 대한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부모에 대한 사랑과는 완전히 결이 다르다.


이처럼 같은 단어도 어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느냐, 어떤 상황 속에서 나오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말이 되어버린다. 이는 언어의 동음이의적인 특성 때문이다. 소리는 같으나 의미가 전혀 다르다는 뜻이다. 언어의 다의성과 동음이의성 모두 결국 중요한 것은 "맥락"안에서 정확한 의미를 갖는다는 점이다. 앞뒤, 상황, 발화자 등 그 언어적 표현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맥락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어야 표현하고자 하는 이의 의도를 정확히 알아차릴 수 있으며 오해가 없다. 문제는 우리가 인간인 탓에 모든 맥락을 정확히 파악해내기 어렵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 기생충에서 송강호(기태)는 자식에게 이런 말을 한다.


최고의 계획이 뭔지 아니?  
무계획이야 노플랜,
계획대로 되는 게 없거든.


장면을 보면서 굉장히 다란 허무함과 허탈감 그리고 무한에 가까운 듯한 무기력을 목격한 듯하여 내 안에서 슬픔이 올라왔다.


왜냐하면 기태는 비록 계획 없이 살아왔지만 자식을 향해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라는 기생충의 명대사를 던지면서 계획을 추종하고 동경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비록 부도덕하고 사회규범에 어긋나는 계획이었을지언정 계획을 세워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자녀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짓던 아비의 입에서 절체절명의 곤경의 순간에 나온 해결책이 "노플랜! 인생은 계획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라니, 간절한 눈빛으로 아비를 바라보던 자식들의 허망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우리도 사실 일상에서 이런 말을 많이 사용한다. 인생 계획대로 되는 것 없어. 너무 재고 따지면서 살지마. 순리대로 흘러가는 게 인생이야. 이런 말을 들을 때면 우리는 보통 고개를 끄덕인다. 고개를 끄덕인다는 것은 그 의견에 동의하는 부분이 51퍼센트 이상이라는 말일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계획대로 살지 말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으면서 송강호의 대사에서는 짜증스러움과 한심함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그것은 그 말을 뱉는 사람과 발화되는 상황이 뒤얽혀서 생명력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가난, 무계획적인 삶, 위기의 순간을 외면하려는 태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집을 잃은 상황 등 여러 요소들이 뒤섞이며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상황을 바꿔보자. 똑같은 말을 교황이나 워렌 벗핏, 빌 게이츠 같은 글로벌 리더가 했다고 가정해보자. 아니 가정이라고 할 필요가 없을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은 분명 살아가며 저런 말을 한 번쯤은 누군가에게 내뱉었을 테다. 말이라는 것은 돌고 도는 법이니까.  


저들에게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아니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나 글로벌  경제 리더씩이나 되는 사람들이 인생은 노플랜이라는데 누가 그 앞에서 "당신이 틀렸다"라고 과감하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말이 무조건 맞기 때문이 아니다. 말에 "권위"라는 것이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것은 그래서 절대적이지 않다. 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 언제 하느냐에 따라 맞는 말이 되기도 하고 틀린 말이 되기도 한다.


맞는 말을 하고 싶다면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맞는 말을 하는 사람이란 "하루는 24시간으로 구성되어 있다"와 같은 뻔한 소리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말에 "권위"를 부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자녀에게 책을 읽으라고 하려면 본인이 책을 읽어야 한다. 자녀가 공부를 잘하길 바란다면 본인도 공부를 해야 한다. 자녀가 좋은 사람이 되길 바란다면 자신도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도덕을 말하려면 도덕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의를 말하려면 정의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이 "권위"를 쉽게 세우기 어려운 까닭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늑대가 되던지 사슴이 되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