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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13. 2021

늑대가 되던지 사슴이 되던지

분노와 무기력은 같은 말

드라마 D.P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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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D.P가 핫하다.

군대 내 부조리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나라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남성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종교와 군대, 입시 문제는 건들면 안 된다는 불문율을 건드렸기 때문일까? 소재의 화제성도 드라마가 뜨거워지는데 한몫했을 테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국민의 절반인 남성, 거기에 그들의 가족까지 더한다면 우리나라에서 군대에 대해 완벽히 무관해질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존재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군대는 인간의 악한 본능이 가장 쉽게 드러나기 쉬운 구조로 짜여있다. 직급에 따른 완벽한 계급사회이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짜인 계급사회 속에서 도덕과 예의, 배려와 관용은 전적으로 개인의 성품에 기댈 수밖에 없는 시스템 외부의 산물로 치부된다.


"그때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어"라는 말이 가진 폭력성은 낯선 것이 아니다. 한나 아렌트는 그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히틀러 곁에서 유대인을 학살하는 일에 가장 앞장섰던 아이히만은 엄청난 악마가 아니라 그저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관습, 시스템, 해오던 것, 분위기를 흐리지 말라는 등 정당해 보이는 다양한 이름의 보호 아래 자행되는 수많은 폭력과 억압, 제2, 제3의 부조리들을 알고 있다. 그러한 부조리 속에서 우리는 언제나 가해자, 피해자, 방관자, 반항아 넷 중 하나의 포지션일 수밖에 없다. 소수의 가해자, 피해자, 반항아와 절대다수의 방관자로 구성된 무리 속 인간들은 얽히고설켜 다른 시간, 다른 장소에서 또 다른 역할로 살아간다.


히어로를 꿈꾸지만 대부분은 방관자였다가,
가끔은 가해자나 피해자가 된다.


폐급, 관심병사, 고문관이라는 말로 군대에 적응하지 못한 채 무리에서 자발적, 비자발적으로 이탈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 새끼는 그럴 만 해."라는 식의 말로 가해자들은 그들의 폭력을 정당화하려 한다.


조직생활을 하다 보면 조직에 피해를 주는 사람이 분명히 존재한다. 개인보단 단체가 우선이고 작은 실수가 생명에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군대라는 특수한 조직 안에서는 그것이 더욱 민감한 문제로 부각되기 쉬울 테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을 괴롭히고 인권을 유린할 정도의 폭력을 자행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나는 조국을 위해 충성을 다했다는 아이히만의 말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

시스템적으로 보완을 해서 문제 상황을 발생시킬 만한 사람은 징집 대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말, 20대 청년들의 정신적 성숙을 도모해야 한다는 말은 맞는 말이지만 공허하기만 하다. 6.25 이후 70년이라는 세월이 흐를 동안 그것을 과연 몰라서 안 했을까? 알면서도 바꾸기 힘든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피해자는 무기력해지거나 분노한다.


무기력과 분노는 그런 의미에서 같은 계열 안에서의 전직으로 봐야 한다. 군대 내 부조리, 직장 내 따돌림, 교내 왕따, 가족 간 차별, 모두 동일하다. 어떤 환경이건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반복되는 억압적 상황 속에서 피해자는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그 안에 들끓는 분노를 평화적인 방법으로 잠재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기력해져 자신을 죽이거나 분노하여 타인을 죽이는 것 말고 제3의 선택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이 되었건 폭력의 계승이라는 점에 있어서 악은 또 다른 악을 낳는다는 것을 확인하게 될 뿐이다. 피해자는 늑대가 되어 복수나 분노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폭력을 정당화하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거나 사슴이 되어 끝없는 무기력을 껴안고 영원한 피해자로 머물게 된다.


자신을 죽이거나 타인을 죽이는 방식으로 드라마가 마무리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말이다. 폭력은 대부분 그렇게 끝이 나고 또 대물림되니까.


살다 보면 여기서 멈춰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 때가 있다. 그 순간을 넘어서게 되면 자력으로 그 이전으로 되돌아가기는 거의 불가능해진다. 늑대와 사슴, 피해자와 가해자는 종이 한 장 차이다. 괴롭힘의 수준이 스트레스를 참아낼 수 있는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 인간은 악마가 된다.


분노는 또 다른 분노를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는다. 끊어내도 끊어내도 반복해서 자라나는 이 폭력의 씨앗을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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