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등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가

답이 없는 문제인 것 같아도

by 정 호

인간으로 살면서 피할 수 없이 언젠가 반드시 마주하고야 마는 것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보통 죽음이다. 직접적으로 죽음의 문턱에 다가서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지인들의 죽음을 간헐적으로 마주하며 살아가기 때문에 가장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의외로 피할 수 없는 것들 가운데 어쩌면 가장 빈번하게 마주하게 되는 것이 죽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과 세금은 피할 수 없다고 어느 누가 말했던가, 피할 수 없는 어떤 대상이 우리에게 서서히 다가오고 있음을 느낄 때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죽음 이외에 인간이 피할 수 없어 기어코 마주하게 되므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는 또 다른 대상은 무엇이 있을까? 철학자 야스퍼스는 이를 두고 "한계상황"이라 정의 내렸다. 인간이 피할 수 없이 결국 마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들. 야스퍼스는 죽음, 생존경쟁, 고통, 죄 4가지 한계상황을 인간이 결코 피할 수 없이 마주하고야 마는 대상이라고 말했다.


죽지 않는 사람, 경쟁 없이 생존하는 사람,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은 없다. 각각의 단어를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 그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이냐에 따라 죽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죄를 짓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딘가에서 튀어나올 수도 있을 테지만, 그것은 일반적인 시선이 아닐 테니 야스퍼스의 말에 조금 더 고개가 끄덕여질 법도 하다.


야스퍼스가 말한 네 가지 한계상황 가운데 "생존경쟁"에 대해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경쟁의 부정적 속성 가운데 가장 힘이 센 것은 아마도 갈등일 테다. 야스퍼스의 말이 맞다면 생존경쟁을 피할 수 없다는 말은 곧 갈등을 피할 수 없다는 말과 같다.


세상은 갈등과 대립으로 가득 차 있다고 불평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면 갈등과 대립은 사라질 수 있을까? 그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비단 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라는 말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툼과 갈등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끼고 경험적으로 알고 있다. 애써 봉합을 해도 새로운 종류의 갈등이 언제고 그 얄팍하고 허술한 봉제선을 뚫고 튀어나온다.


그렇다면 갈등을 해결하려는 노력은
의미 없는 행위일까?

도의적으로, 실리적으로 생각해봐도 이건 또 그렇지가 않다. 게다가 눈앞에 벌어지는 문제를 두 손 놓고 그저 지켜보고만 있기엔 인간은 이성을 가진 죄인인 탓에 그렇게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성은 문제 상황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어떻게든 해결하고 개선하여 더 나은 상황으로 만들고자 애쓴다. 그래서 어렵다는 것을 알면서도, 반복되는 문제라는 것을 알면서도 일단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 이성적인 인간이 짊어진 괴로운 사명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가장 괴로운 것은 이런 문제
(경쟁 = 갈등)가 끝없이 반복된다는 점이다.

비관적인 생각을 잠시 거두고 생각해본다면 정치인, 종교인, 교육자, 의료인, 법률가, 철학자, 기술자, 과학자 등 어떤 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되었건 간에 이들 모두는 각자의 신념에 따라 세상을 더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고 있을 테다. 개인의 이해득실과 입신양명을 위해 움직이는 사람들도 물론 존재할 테지만 대부분의 선량한 사람들은 본인의 이상과 신념을 위해 전념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모두가 선한 의도를 가지고 일을 진행함에도 불구하고 갈등은 결코 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어디 세상 일처럼 거대한 단위에서만 발생하는 사건인가. 나 하나만 들여다봐도 매일 다툼이 벌어진다. 갈까 말까, 뱉을까 삼킬까, 달릴까 멈출까, 선택할까 포기할까, 회피할까 부딪힐까, 어디 즈음에서 경계를 지어야 할까, 끊임없는 내적 갈등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 개인이다. 하기 싫은 것과 하고 싶은 것, 이상과 현실, 게으름과 열정, 감정과 체면, 우리는 수많은 내적 갈등과 모순 사이를 오가며 내 안의 갈등을 매일같이 조율한다.


자신을 잘 아는 사람들은 외부의 다툼과 갈등에 대해 그러려니 하게 된다. 세상 일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다는 것을 자신을 통해 일찍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고로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심이 현저히 부족한 사람은 자기 이해도가 현격히 부족하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좋다. 세상이 원래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성의 눈을 잠시 닫아두고 모르쇠로 일관해야 할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해결해도 해결해도 끝없이 문제가 발생하는 세상 속에서 죽을 때까지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지치지 않도록 스스로를 보살펴가며 살아야 할 것인가.

다소 진부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정해져 있다. 모르쇠보다는 고통이 반복되더라도 현재 내 앞에 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 나가면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것을 무의식 중에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철학자는 과거와 현재 미래는 모두 연결되어 있으며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라고 말한다. 아인슈타인 역시 상대성이론을 통해 비슷한 말을 했다. 그렇다면 현재를 충실히 살아내는 것만이 정답일 테다. 하지만 현재는 관측되지 않는다. 현재를 사는 동안 현재는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오직 시간이 흐른 뒤 현재가 과거가 된 이후 미래의 내가 과거가 된 당시의 현재를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쉽게 말해 내가 지금 선택하고 있는 모든 것들이 정답인지 오답인지는 시간이 흐른 뒤에서만 판단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갈등 상황이나 반복되는 문제 상황에서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현재를 오답으로 만드는 것과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새로운 문제에 더해 기존의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세상도 개인도 문제를 해결하고 변화를 받아들일 때에서야 비로소 내일로 한 발 자국씩 나아갈 수 있다. 갈등과 변화는 자연법칙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