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집 파이팅
누군가의 등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런 순간들이 있다.
나에게 이별을 고하고 차갑게 돌아서서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또각또각 걸어가는 연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영문도 모른 채 그저 멀뚱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가. 울고 싶지 않지만, 애원하며 매달리고 싶지도 않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 울며 매달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 처하게 될 때 우리는 "자기"를 잃어버린다. 자기를 인식하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염치와 부끄러움을 느낀다. 자기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할 정도로 혼이 빠져나가는 경험을 할 때,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체면과 염치와 타인의 시선이 우리의 움직임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받게 될 때 우리는 그저 멍하니 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이와 결이 비슷한 몇몇 순간들이 떠오른다. 오랜 시간 얽힌 감정의 실타래를 미처 풀어내지 못하고 지내는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는 마음과 말이 얼마나 많을까. 마음은 그렇지 않을진대 어긋나 버린 관계의 통로를 따라 말까지 덩달아 꼬여서 나와버리고 마는 비극은 늘 대화의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짓지 못하게 만든다. 하고픈 말을 꾹 눌러 담고 떠나는 부모의 뒷모습 혹은 자식의 뒷모습을 바라봐야 할 때 그 속은 썩어 문드러진다는 표현이 딱 어울릴 만큼 곪고 또 곪아있을 테다.
군대에 입대하는 아들의 뒷모습과 결혼식장에 들어서며 아버지의 손을 놓고 신랑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딸의 뒷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부모의 마음은 어떠한가.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힘찬 도약의 일환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애가 타고 걱정되기 마련이다. 잘 해낼 수 있을지, 어려운 고비를 헤쳐나갈 수 있을지, 도움이 필요하진 않을지, 내 눈과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식을 떠나보내는 부모의 마음은 애간장이 녹다 못해 끓고 끓어 증발하기 직전의 상태에 도달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졸업식이 끝난 뒤 학교를 떠나는 제자들의 마지막 뒷모습은 어떠한가. 시원섭섭하다는 표현처럼 말 안 듣는 사고뭉치 녀석들을 떠나보내니 시원한 기분이 드는 것도 어느 정도는 사실이지만 또 그만큼 정이 든 것도 사실이기에 섭섭하기도 하고 앞으로 그들에게 펼쳐질 세상은 사고뭉치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는 세상이기에 걱정이 앞서기도 한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런 모든 뒷모습들에는 더 이상 내가 관여할 수 없도록 보이지 않는 장벽이 우뚝 세워져 감히 손을 뻗을 수 없게 만들어버리는 것을.
최근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 겪는 3년의 시간이 인간의 인지, 정의, 행동적 영역에 평생토록 끼치는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육아 지침에 따라 세돌이 되기 전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기로 우리 부부는 합의를 내렸다. 그렇게 세 돌이 되도록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선을 다해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처음 어린이집에 등원하는 날 아내는 연차를 내고 아이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 문턱을 넘어섰다. 걱정스러웠던 마음과는 달리 아이는 씩씩하게 선생님의 손을 잡고 어린이집에 들어갔다고 한다. 아이의 첫 어린이집 등원을 기념하며 아이의 뒷모습을 찍은 사진을 저녁에 나에게 보여주며 우리는 아이에 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단한 일도 아니고 우리네가 살면서 겪는 흔하디 흔한 일일 뿐인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이 뭐가 그리 뭉클하고 대견했을까.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는 흔한 일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만이 겪는 유일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은 아이를 둔 모든 부모들이 겪는 일이지만 우리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은 나만이 겪는 일인 까닭이다. 그래서 인간은 보편의 세계보다 주관의 세계에 취약하다. 그것이 보편의 세계를 말하면서 살아가지만 주관의 세계에 머물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