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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Sep 27. 2021

당위를 주장하는 사람과 현상을 설명하는 사람

이상과 현실

(인권이나 차별철폐 전쟁 종식 같은 인류애를 바탕으로 한 평화의 정신에 해서는 무조건적으로 당위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적인 영역에 한정된 글로 읽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평등한 세상이 옳다 vs 세상은 원래 불공평해
올바르게 살아야 해 vs 사람은 원래 악한 존재야


전자는 당위를 주장하고 있고 후자는 현상을 설명하고 있다. 정의롭고 올바른 것처럼 보이면서 다수의 지지를 받는 쪽은 언제나 그럴듯해 보이는 당위를 말하는 쪽이다. 냐하면 당위는 맞는 말일 때가 많고 만약 제대로 작동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누구나 바래 마지않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위가 다수의 지지를 받는 또 하나의 이유는 당위에 목마른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당위에 목마른 자들은 왜 그토록 목이 마른 것인가.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즉 올바르고 정의로워야만 하는 것들이 실상은  반대로 작동하는 것을 무수히 목격하며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을 목격하는 사람은 왜 언제나 다수가 될 수밖에 없는가.


슬프게도 사회의 룰을 만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지도층, 상류층, 지식인, 엘리트 계급이라 지칭되는 사회의 리더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늘 소수일 수밖에 없고 역사상 리더 계급이 소수가 아니었던 적은 없다. 힘없고 돈 없는 사람들 언제나 다수였고 일등과 그 주변 언저리 어디 즈음에 위치해있지 않은 평범한 대다수의 사람들은 리더들이 만들어둔 룰 안에서 서로 경쟁하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힘없는 다수는  올바르고 정당하며 힘 있는 소수는 언제나 그릇되고 정의롭지 못하느냐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다.


힘없는 다수가 주장하는 것들이 정당할 때가 많느냐는 물음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힘 있는 소수가 정의롭않을 확률은 꽤 높아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정의롭지 못하다는 말을 조금 더 다듬어보자면 인간의 이기적 본능에 조금 더 충실해진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기적인 본능에 충실해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의 안위를 가장 우선순위로 생각하고 사리사욕에 조금 더 솔직해지며 그것을 정당화하는 과정에 있어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함을 뜻한다. 힘 있는 소수는 인간의 이런 이기적인 본능을 충족시킬 수 있는 여러 조건들을 갖춘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악하다는 근거 아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인 사람들, 다시 말해 사람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라는 "현상"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적응해 나가는 사람들은 현실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다.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옳고 그름의 차원은 아예 논의 밖으로 배제하고서 생각한다. 오직 이런 현상 안에서 어떻게 "적응"하여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몰두한다.

 

하지만 이런 현실은 받아들이지 않은 채 끝없이 당위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이래야 해, 저래야 해, 이게 옳은 것이고 저것은 그른 것이야. 이런 말들은 가볍게 들을 땐 맞는 말일 때도 많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사실 옳고 그름의 문제는 주관의 문제라 당위라는 것도 어찌 보면 절대적인 정답이 없는,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문제로 봐야 할지 모른다.


김제동과 서장훈이 청년들에게 건네는 조언을 두고 인터넷 상에서 갑론을박이 펼쳐진다. 당위와 현실을 대표하는 이미지의 부딪힘이 아니었나 싶다.


세상은 진보해 왔고 그 진보의 과정에는 항상 당위가 앞장섰다. 올바라야 하는 것, 마땅히 그래야 하는 것, 누가 봐도 옳은 것, 이러한 것들이 세상에 목소리를 내고 다수의 지지를 기반으로 힘을 얻게 될 때 세상은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게 된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렇게 진보하고 발전을 이룩한 당위는 다시 또 현실이 되고 만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듯 어제의 당위가 오늘의 현실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 빈자리엔 또다시 새로운 당위가 리를 차지한다. 


무엇을 선택할지는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정의와 당위를 외치는 사람은 인기인이 될 수 있다. 현실과 요령을 말하는 사람은 때때로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당위가 옳은가 현실 직시가 옳은가를 구분 짓는 일은 중요해 보인다. 하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주장하는 이들의 힘의 근간이다. 언제나 말이 힘을 가지려면 말하는 이의 행동과 삶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애상담은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이 해줄 수 있고 결혼상담 역시 미혼자보단 기혼자가 더 생생한 조언을 건넬 수 있다. 의사의 고충과 농민의 고충은 의사나 농부가 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 수가 없다. 당위가 되었건 현실 직시가 되었건, 무엇을 외치더라도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당위나 현실을 외칠만한 자리에 서있을 때 그 주장에 힘이 실린다.


자신의 주장을 이루기 위해 기득권의 지위를 이용하고 난 뒤 그 자리를 내려놓는다면 모를까 기득권 속에 안전하게 있으면서 만민평등을 외치는 것은 당위의 주장이 아니라 오히려 기만에 가깝다. 그러므로 당위를 외치는 자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지금 서있는 자리 혹은 그 사람이 자신의 주장을 이룬 뒤의 행보를 보면 된다.


반대로 아무것도 이뤄본 적 없는 사람이 말하는 현실 직시 타령은 맥이 빠진다. 본인의 힘으로 성취해 낸 것이 아무것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이 이러니 저러니 하는 것은 그리 잘 아는 사람이 어찌 저 모양일까 하는 측은지심만 불러올 뿐이다.


포지션을 잡으려면 확실하게 잡아야 한다. 도덕과 당위를 외치려면 도덕과 당위의 세계에 발을 들여야 하고 현실과 적응을 외치려면 현실과 적응의 세계에 발을 들이밀어야 한다. 관중석에서 외치는 것은 게임에 아무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위의 세상도 좋고 현실의 세상도 좋다. 인간은 대부분 당위를 외치고 바라보지만 실상은 현실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상은 이상이기 때문에 아름답고 모두가 바란다. 천국에 사는 사람은 천국을 부르짖지 않는다. 천국에 가자고 노래 부르는 일도 물론 중요할 테지만 그보다 더 급박한 일은 오늘 하루를 어떻게 기쁘게 보낼 것인가 고민하는 일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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