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 때가 드러나는 순간

고여 있는 변기 물

by 정 호

속이 다 비칠 정도로 맑고 투명하여 깨끗해 보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때를 품고 있어 시간이 지난 뒤에서야 조금씩 그 속 때가 드러나는 것들이 있다. 입을 대고 마신 페트병 속에 들어있는 생수나 변기 안에 고여있는 투명한 수돗물 같은 것들이 그렇다. 어느 날 우연히 안방 화장실의 변기를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있었다.


요즘 지어지는 대부분의 아파트들이 그러하듯 우리 집에는 2개의 화장실이 있다. 안방에 딸려있는 화장실과 현관 입구에 배치된 화장실. 평소 우리 식구의 생활패턴을 살펴보면 안방 화장실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아침 출근 시간에는 서로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부부의 퇴근 이후까지는 집에 사람이 없는 관계로, 퇴근 이후에도 아이가 일찍 잠이 드는 경우에 아이의 수면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그 이외의 경우에도 우리 가족은 어쩌다 보니 안방 화장실을 거의 사용하지 않은 채 방치해 두게 되었다. 유일하게 오랜 시간 사용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아이와 목욕놀이를 하는 시간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겨울이 오기도 했고 폐렴과 장염으로 최근 병원에 몇 번 입원을 한 뒤로는 추운 날씨에 오래도록 목욕을 하는 것도 조심스러워 거실 화장실에서 재빨리 샤워를 시키는 것으로 목욕놀이는 당분간 금지하기로 아들의 동의 없이 부부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렇게 안방 화장실을 마지막으로 사용했던 때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할 때 즈음에 안방 화장실을 들어가 보곤 깜짝 놀라고 말았다. 변기 안의 투명한 물의 색과는 대조적으로 물의 가장자리를 까만 선이 둘러싸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던가, 물이 고여서 썩은 것인지 원래 썩어있던 물이 고여 있었던 탓에 투명함 속에 숨기고 있던 땟구정 물을 흘려보낼 곳을 찾지 못하고 피치 못했다는 듯, 새까만 속을 기어코 들켜버리고 말았던 것인지 모르겠으나 어찌 되었건 오랜만에 마주한 안방 화장실 변기에 오랜 시간 고여있던 투명한 수돗물 속에 숨어있던 땟구정 물을 발견해버리고 말았다.


오랜 시간 투명함 속에 숨겨두었던 땟국물은 솔질 몇 번에 언제 그 자취를 드러냈냐는 듯 슥슥 지워져 손쉽게 모습을 감춘다. 그리고는 또다시 맑고 투명한 변기 물로 자신의 속에 있는 악취와 찌꺼기들을 요령껏 감추어낸다. 매일 소변과 대변을 마주하며 변깃물은 쏴아 쏴아 잘도 흘러내려간다. 소변과 대변, 머리카락 등 외부의 오염물과 마주할 때면 변기 안에 투명한 수돗물은 금세 투명함을 잃어버리고 혼탁해져버리고 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변기 레버를 누름과 동시에 새로운 투명한 수돗물로 금세 자신의 모습을 유능하게 바꾸어낸다.


변기 물을 보고 생각이 떠올라 글을 쓰고 있지만 사실 오랜 시간 고여있을 때 땟국물이 떠오르는 것이 어디 변기 안에 물 뿐이겠는가. 빗물도 그렇고 우리의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땀도 마찬가지일 테다. 어쩌면 정수기의 필터를 거쳐 나오는 정수된 물도 오랜 시간 담아둔다면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다.


고여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노하우, 요령, 능수능란, 베테랑, 장인과 같은 어떤 숙련된 이미지로 대표되는 장점들이 있을 수도 있을 테지만 땟국물로 이야기를 꺼냈으니 장점 말고 단점에 대해서 조금 더 생각을 해보도록 한다.


오랜 시간 비슷한 환경에 노출되어 기존의 시스템에 익숙해졌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테다. 그것은 능숙해졌다는 것을 뜻하지만 다른 말로는 매너리즘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익숙하고 편해진다는 것은 내 안의 악함이 조금 더 손쉽게 발현될 수 있는 환경이 되기도 한다. 인간은 적당한 긴장 속에서 자신을 어디까지 내비칠 것인지 스스로 검열하기 때문이다. 자기 검열이 결코 바람직한 행위는 아니지만 나이나 직위, 연공서열, 익숙함 등의 권력에 힘입어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핑계 삼아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을 잊어버리는 몰염치와 방종보다는 낫다. 자기 검열은 자신을 해치는 행위이지만 몰염치는 타인을 해치는 행위인 탓이다.


내 안에 때를 지워내는 일도 물론 중요할 테지만 때가 드러나지 않도록 환경을 설정하는 일 또한 중요하다. 때를 완전히 지워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지만 때가 드러나지 않는 환경을 설정하는 것은 조금 더 가능성이 높은 일이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도록 변기 물을 고여있게 놔두어서는 안 될 일이다. 변기 속에 아무것도 없다고 할지라도 가끔씩 물을 내려주는 습관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