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어떻게 시작되는가

믿음은 정말 자발적인가

by 정 호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에 대한 스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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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을수록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에 조금 더 몰입이 된다.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둘 중 좋아하는 이야기를 선택하라고 한다면 꿈과 희망을 노래하는 유토피아적 이야기를 선택하겠지만 무엇이 더 끌리느냐고 묻는다면 디스토피아적 이야기에 손을 들어주고 싶다.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을 가진 작품에 자발적으로 몰입도가 높아지는 이유는, 그것이 보다 현실에 가까운 이야기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꿈과 희망은 내일의 이야기이지만 현실은 오늘의 이야기인 탓이다. 내일 일어날 일들은 잠시 미뤄둘 수 있지만 오늘 일어날 일은 미룰 수가 없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은 종교와 철학을 소재삼아 인간의 믿음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는 천사의 이미지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천사라는 존재에 의해 내가 몇 날 몇 시에 죽을 것인지 고지를 받음과 동시에 인물들의 생은 지옥으로 탈바꿈한다. 그 고지는 20년 전에 나타나기도 하고 며칠 전에 발생하기도, 심지어 몇 초 전에 갑작스레 발생하기도 한다. 그리고 정확히 그 시간이 되면 지옥의 저승사자 3명(?)이 동시에 나타나 고지받은 인물을 기어코 태워 죽이고야 마는데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순간을 시연이라는 용어로 정의한다.


이 지옥이라는 드라마의 제목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고시받은 시간에 죽음을 맞이하며 지옥에 가기 때문에 지옥이라기보다는 살아서 지옥을 기다려야 하는 것이 더욱 공포스러운 일이라는 점에서 어쩌면 연상호 감독은 결정된 불행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하는 삶을 지옥으로 규정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실제 드라마에서는 죽은 이후에 사람들이 떨어지는 지옥에 대해서 묘사하지 않는다. 그보다 오히려 고시를 받은 이후 언젠가 마주해야 할 시연의 순간을 두려워하며 공포에 떠는 인간의 모습을 자세히 조명한다. 더욱이 지옥을 고지하는 존재가 천사라는 점에 있어서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천사와 악마는 무엇인가 우리 머릿속에 들어있던 기존의 관념은 뒤죽박죽 뒤엉켜버린다.


우연인가 정해진 일인가


가능론과 결정론이 있다. 가능론은 정해진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모든 일은 인간의 의지나 우연한 사건의 마주침으로 발생한다는 것이고 결정론은 모든 것은 애초에 이미 다 예정된 일이었다는 것이다.


자기야 아빠 장례식 날 우리 엄마 본 적 있지.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한테 연락한 뒤에
나.. 그런 상상을 한 적 있다?
엄마가 내 손을 잡고 미안하다고, 보고 싶었다고
울면서 나한테 용서를 비는 거야.
나는 원망하는 척 조금 하다가
엄마 손을 잡고 엉엉 우는 거야.
그런 상상을 했어.
근데 엄마가 그러더라,
아빠랑 이혼할 때 경황이 없어가지고
위자료를 제대로 못 받았데.
아빠가 재산을 얼마나 남겼냐고,
자기가 그 재산의 권리가 있다고,
30년 만에 딸을 처음 봤는데
어떻게 지냈는지 한마디도 안 묻더라.

세상에 그런 엄마도 있는 거야.
이제 와서 뭐하러 그런 생각을 해.

그럴 수 있지.
근데 왜 하필 그런 인간이 내 엄마냐고.


우리는 매 순간 신중을 다해 선택을 하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선택의 결과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흘러가는 경험을 하곤 한다. 그런 순간이면 애초에 우리의 선택이라는 것이 삶에 있어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것은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물음에 봉착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부모를 선택할 수 있는가? 부모의 인성을, 부모의 경제력을,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받게 될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설정하는 데에 있어 나의 의지가 들어갈 틈이 아주 조금이라도 존재하는가? 태어남을 선택할 수 있는가? 죽음은 선택할 수 있는가? 직업은 어떠한가? 자녀는 어떤가? 친구관계는?


어쩌면 우리는 모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포장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실상 중요한 선택 앞에서는 그 어떤 선택권조차 없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연상호 감독은 던지고 싶었는지 모른다. 결정된 불행을 마주하는 것이 지옥이라는 것. 사실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 드라마의 초반부는 이런 결정론적 세계관이 주를 이룬다.


드라마는 초반부터 강력한 비주얼 충격을 시청자들의 두 눈에 때려 박는다. 벌건 대낮에 카페에 앉아있는 한 사람에게 지옥의 사자 3인방은 쿵쾅거리며 뛰어와 도심 한복판에서 시연이라는 이름의 살인을 저지른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도저히 분간이 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사람들과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진다. 혼란한 상황 속에서는 언제고 약삭빠른 사람들이 이득을 취하려 한다. 그리고 그것은 거의 항상 "정의"나 "올바름"으로 무장하고 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우연히 발생하는 이 고지와 시연이라는 이름의 저주와 살인을 통해 이득을 얻으려는 세력이 등장한다. 이 세력은 추후 세가 확장되며 이익집단으로 변모하지만 시작만큼은 결코 개인적 이득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정진수(유아인)는 고시를 최초로 공식화하여 그것으로 사람들의 두려움을 자극해 신흥 종교를 부흥시킨다. 사람들의 머리에 나쁜 짓을 저지르면 "고지"를 받게 되고 그 고지는 반드시 현시대에서 "시연"되므로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살라는 정의구현을 모토로 하여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그의 다짐은 한편으로 정당해 보인다.


하지만 정진수는 자신의 이상과 모순되는 비밀을 끌어안고 있었다. 자신은 사실 살면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것. 즉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으나 "고지"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고지"와 "시연"이라는 반드시 발생하는 현상을 자신의 정의구현의 도구로 사용했다는 점에서 이미 시작부터 모순을 끌어안은 채 정진수의 신흥 종교는 결말이 보이는 부흥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빛을 앞세운 어둠은 얼마나 강대한가. 자신들의 이상과 논리를 강화하기 위해 아전인수 격으로 인과관계가 불투명해 보이는 사례들을 끌어다 쓰는 것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목격해 왔는가. 그것은 비단 종교나 정치처럼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는 집단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은 아닐 테다. 우리 개개인 역시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정당화하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정의와 올바름으로 늘 무장하려 애를 쓰니 말이다.


이것은 믿음이 너무 강력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부작용이다. 하지만 인간은 모두 믿음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가. 배우자에 대한, 자식에 대한, 일에 대한, 종교에 대한, 삶에 대한, 자신만의 공고한 믿음. 그런 믿음이 객관적인 사실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는가. 믿음이 강력하면 강력할수록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부정하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나 임신하고 매일 다짐했어.
우리 아기한테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사랑을 줘야지. 그래서 사랑받는 게 너무나도 당연한
그런 평범한 아기로 키워야지.
근데 지금은 그게 너무 끔찍해.
저 몸뚱이에 뭐가 들었길래
태어나자마자 고지를 받은 걸까?
나 매일 이런 생각이 드는데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이 너무 끔찍해.


"고지"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내려지는 신의 계시이고 그것은 반드시 현시대에 "시연"됨으로써 정의가 구현된다는 강력한 논리가 고착화된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갓 태어나 이름조차 짓지 못한 아기에게 "고지"가 내려졌다는 것은 정진수(유아인)의 새진리회의 논리에 따르면 그 아기에게 분명 어떠한 죄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잠시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제 갓 태어나 어떤 행위도 발생시키지 않은 존재에게 어찌 죄가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즉 애초에 유아인이 인식하고 있었던 사건. 죄를 짓지 않아도 "고지"를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아기를 통해 한번 더 입증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종교든 정치든 그것이 힘을 가지려면 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철저한 논리가 필요하다. 어느 정도 세력이 커진 이후에는 논리가 먹혀들어가지 않는 팬덤 현상이 발생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논리는 그 팬덤의 허술함을 탄탄히 묶어두는 역할을 끊임없이 하기 위해 존재의 의미를 갖는다.


보통 우리에게 익숙한 재난 영화의 플룻은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해나가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해나간다. 이것은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것을 발생시킨 원인이 존재한다는 인과론을 우리가 강력하게 믿고 있는 까닭이다. 하지만 인과론은 정말 유효한가. 모든 것에는 정말로 원인과 결과가 존재하는가. 때때로 어떤 일들은 아무 원인 없이 발생하는 우연과 그런 우연들의 비정형적인 결합의 결과는 아닐까.


인과론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플라톤과 마주하게 된다. 모든 현상(결과)들은 사실 그것의 본질이 되는 이데아(원인)가 있고 우리는 동굴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죽을 때까지 본질(이데아)에 도달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아직까지도 강력하게 우리의 사고 과정을 지배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또 다른 철학자 들뢰즈는 인과론은 무용하며 모든 것은 우연적 요소들의 마주침으로 발생하는 것이라고 우리의 삶을 설명한다.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우연과 가능론의 손을 들어준다. 모든 것이 결정되어 있다는 지금까지의 논리구조와 달리 "고지"를 받은 아이를 감싸 안은 채 아이 대신 죽음을 맞이하는 부모의 모습을 바라보며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 힘으로 무언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기존의 법칙을 깨뜨리는 예외 사례는 그렇게 새로운 세상으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이 된다.


인과론에 대한 의문. 우연적 사실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하여 이득을 얻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우리는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하는가. 믿음은 어떻게 형성되어 가는가. 많은 질문을 던지게 만드는 드라마였다. 인과 관계가 명확해 보이는 결정론적 사고에서 시작하여 인간의 자유 의지에 희망을 던지는 것으로 마무리되는, 현실을 이야기했지만 마지막에 가서는 희망을 부르짖는 이상적이면서도 인간적인 드라마였다. 연상호 감독의 이야기처럼 소모적으로 감상하고 끝나버릴 콘텐츠가 아닌, 많은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묵직한 철학책 한 권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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