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던 피터슨은, 예술가란 홀로 변경에 서서 아직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것으로 변환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 내린다. 그의 말처럼 혼란과 결핍, 갈증은 예술의 동력이 된다.
조던 피터슨의 아내는 암에 걸렸고 딸은 젊은 나이에 인공관절을 삽입하였으며 피터슨 본인은 불안과 우울증으로 약물 치료를 받다가 약물 중독에 빠지게 된다. 온 가족이 병마와 싸우면서 그들의 육체와 정신은 동시다발적으로 뿌리째 흔들린다. 하지만 그들은 자연재해와 같이 갑작스레 다가온 질병들과의 싸움에서 기적과 같이 승리를 일궈낸다. 그리고 그 고통의 시간은 피터슨의 개인적 역량과 그가 이전에 겪어왔을 수많은 경험들과 뒤섞이며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어떤 경지로 피터슨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조던 피터슨처럼 스틱스 강을 건너며 죽음 근처를 지나 보았거나, 결코 부서질 거라고 생각해본 적 없었던 삶의 규칙성이 무너져 내리며 질서의 균열이 삶으로 곧장 파고 들어오는 것을 막아내지 못한 사람들은 깨닫게 된다. 그동안 알고 있던 세계의 질서와 규칙이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혹은 반대로 그동안 생각했던 규칙과 질서가 생각보다 훨씬 중요했다는 것을, 다시 말해 모든 가능성에 대해 보다 심도 깊은 가치판단의 작업을 진행시킬 수 있는 권한을 죽음으로부터 부여받은 셈이다. 전반적인 감상에 앞서 총 12개의 챕터 가운데 기억에 남는 몇몇 챕터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해보자.
조던 피터슨이 제시하는 인생에 있어 중요하게 여겨야 할 첫 번째 법칙은, 늘 신중하라는것이다.
첫 번째 챕터에서는 외로움에 사무친 한 사람이 등장한다. 그는 복잡한 개인사의 희생양이었지만 결국 그것을 이겨냈다. 그가 자신의 우울증을 극복해낼 수 있었던 이유는 대인관계의 가치를 깨닫고 사회에 스며들면서 세계의 중요한 가치들을 습득하고 그것을 차근차근 실행에 옮겼기 때문이다. 피터슨은 사회 계약설을 이야기하며 사회에는 올바른 길잡이와 바람직한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가치 있고 주목할만하다고 여겨지는 것들이 우뚝 솟아있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온전한 정신이며 그렇게 살지 않을 때 우리는 세계에 압도된다고 말한다. 개인은 사회 제도와의 부단한 상호작용을 통해 복잡한 세계의 노이즈를 축소시키고 의미 있는 것들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한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은 모두 중요하므로 함부로 깎아내리는 실수를 범하지 말라고 말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지만 새로운 것의 중요성보다는 기존의 것에 조금 더 무게를 두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두 번째 법칙은 목표 설정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목표를 설정하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 얼만큼의 간극이 생길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우리 모두 공감을 하고 있을 만큼 익숙하다. 다만 이 책에서는 어떤 목표를 세워야 할지에 대해 조금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어떤 원형적 이야기에 관한 것이다. 세계는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어떤 원형의 이야기에 도달할 수 있는데 혼돈 속에서 방향을 찾으려면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존재하고 있는그 태초의 원형적 이야기를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원형적 이야기의 사례로 성경을 꼽고 있는데 사실 특정 종교의 경전을 인생의 진리로 제시한다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이 책의 핵심 파트이자 개인적으로 가장 반발심이 강하게 들었던 파트는 책임에 대해 다룬 네 번째 파트였다. 파트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짧은 호흡의 문장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라. 어렵다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당신의 현실을 더 나아지게 만드는 일이다. 사회적 책임을 짊어진다는 것은 특권이다. 사회를 고려한다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별한 짐이자 기회다. 행복은 일시적이다. 행복을 추구한다는 것은 시시포스와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세련된 것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책임이다.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가치가 의미 있다. 시간과 장소를 초월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모두 맞는 말이다. 다만 보편적으로 옳은 말이 나에게도 유효하게 적용될 수 있느냐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책임의 가치와 유효성에 대해서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무척 의미 있는 가치이며 사회와 공동체가 유지될 수 있도록 지지하는 든든한 뿌리 중 하나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정말 개인을 위한 발언인지 책을 읽는 내내 의심스럽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네 번째 챕터에서 이야기하는 저자의 말들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니체가 주장한 노예의 도덕이 떠오른다. 니체는 주인의 도덕과 노예의 도덕에 대해 말했다. 주인의 도덕에는 진취성, 결단력, 창조성과 같은 적극성을 띄고 있는 성질의 것들이 포함되고 노예의 도덕에는 순종, 겸손, 책임, 근면과 같은 수용적인 성질의 것들이 포함된다.
저자는 이 챕터에서 책임의 중요성과 효용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한데 이것이 정말 개인이 행복해질 수 있고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최종 목적지로서적합한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무거운 책임을 기꺼이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개인이 진정으로 행복에 다가설 수 있다는 이야기는 묘하게 기득권의 감언이설처럼 들린다.
전체주의적이면서 공리주의적인 이러한 자세는 여러 가지 고려 요소 가운데 개인을 가장 멀찌감치 떨어뜨려놓고 논의를 진행하는 방식은 아니었던가? 쉽사리 납득되지 않는 사례들과 공허한 개념들이 복잡하게 엮여 있어 저자의 주장이 명료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달을 봐야지 손가락을 봐서야 되겠냐는 말로 저자의 전체적인 주장의 정당성을 훼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지도 모르겠으나 제대로 자라지 못한 나무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숲은, 그 숲의 명성이 사그라들면 아무도 찾지 않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책임을 윤리와 결부시켜 권위를 세우려는 점도 마뜩지 않았다.(책임지는 것이 윤리적이라는 가정, 여기에서 책임은 전체를 위해 나를 희생하는 책임감이다.) 책임감의 사례로 본 챕터에 실린 사례를 하나 소개하도록 한다.
"당신의 아이가 축구 경기를 할 때 득점할 수 있는 좋은 위치에 있는 선수를 포착하고도 패스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윤리적이지 않다."
저자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즉 공리주의를 위해 책임을 최대한 수행하며 공리주의에 부합하는 행동이 책임 있는 것이고 그것은 윤리적인 것이라는 말을 하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팀의 승리와 개인의 영광을 사이에 두고 무엇을 선택할 것이냐는 질문에 우리는 보통 팀의 승리를 염원한다고 답한다. 그것이 대중이 바라는 답이자 우리 사회에 뿌리 박혀 있는 집단주의적 기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은연중에 집단의 이득이 개인의 이득에 우선해야 한다는 것을 내면화한 셈이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개인을 행복하게 만드는가? 우리 팀이 승리하는 것과 내가 골을 넣어 내 몸값이 올라 광고도 찍고 더 좋은 팀으로 이적하는 것 사이에 어떤 것이 나를 더 행복하게 만들까? 아주 소수의, 공적 가치나 나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며 기쁨을 느끼는 사람들도 물론 있겠지만그런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피터팬의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답답함을 느꼈다. 저자는 피터팬을 두고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성숙해지기를 포기한 사람, 즉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의 대명사로 치환해버린다.
불현듯 니체가 주장한 인간 정신의 3단계 발달 과정이 떠오른다. 니체는 인간의 정신이 낙타 - 사자 - 어린아이 3단계의 발달 과정을 거친다고 말했다. 낙타는 복종하는 정신, 짐을 지는 정신을 뜻한다. 사자는 자유로운 정신과 열망하는 정신을 뜻한다. 자유로운 정신이란 기존의 관습과 질서를 파괴하는 힘을 의미한다. 마지막 단계인 어린아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정신을 뜻한다. 이를 보기 쉽게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니체의 인간 정신의 3단계 변화
낙타-책임, 순종-나는 해야 한다(심각, 진지, 장엄) 사자-자유의지-나는 할 것이다(위험, 자유, 파괴) 어린아이-나 자신-나는 나다(창조, 유희, 기쁨)
"질서 너머"의 저자 조던 피터슨이 4번째 챕터에서 이야기하는 책임은 니체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의 정신 수준 가운데 가장 낮은 수준의 정신에 해당한다. 낙타에서 사자로, 사자에서 어린아이로 나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인간은 낙타 단계의 정신수준을 경험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낙타의 정신, 즉 책임감을 기꺼이 짊어지는 정신은 삶에 있어 어느 정도 의미를 가질 수는 있겠으나 그것이 최종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정말 책임지는 삶으로 궁극적 행복에 도달이 가능한가?
철학자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코나투스는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 보존하기 위해 육체(욕망)와 정신(의지) 양쪽 모두를 기쁨의 상태로 끌고 나가고자 하는 힘이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대로 책임지는 삶은 정말 인간의 코나투스를 증대시키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욕망이 거세된 채 이성과 정신만으로 끌고 가는 삶은 제대로 된 삶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섯 번째 챕터에서는 이데올로기를 버리라고 주장한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세계는 결코 간단하지 않은데 세상의 운동 방식을 간단하게 도식화시켜버리는 이데올로기는 우리의 시야를 가린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이데올로기를 버려야 한다. 이데올로기는 이념일 수도, 편견일 수도, 권위일 수도, 개인적 경험의 한계일 수도 있다.
공산주의나 과학의 객관성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로 거대한 이데올로기다. 그것이 늘 올바른 것은 아니다. 그것은 세계를 파편화하여 쉽게 도식화해버린다. 그런 방식으로는 제대로 세계를 파악할 수 없다. 특히 영특하지만 게으른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는 달콤한 유혹을 던진다. 객관성이 절대 진리로 여겨지는 세상에서 가치는 무의미해진다.
다음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마르크시즘을 옹호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저자가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을 가만히 지켜보니 한 가지 모순이 느껴진다. 대부분의 주장들이 그러하듯 일반론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저자의 말은 대체로 맞다. 하지만 저자는 본인의 주장을 통해 스스로 덫에 빠져버렸다.
저자는 첫 번째 챕터에서 기존의 제도나 창의적 변화를 함부로 깎아내리지 말라고 하며 그 이유로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은 각각 고유의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서로 부족한 부분을 채워나가면서 대체하거나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챕터 6에서 마르크시즘을 비판함에 있어서 그는 마르크스주의는 온당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부정적이기만 한 이념으로 치부하는 듯이 기술한다. 저자가 이데올로기를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의 예시로 마르크스주의를 꼽은 이유는 그것이 이미 이념 전쟁에서 패배한 비주류의 이념이고 본인이 속한 계급, 즉 지식인이자 부르주아 계급을 악으로 설정하고 있기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수치를 모르고",
"이러한 종류의 이데올로기적 환원은 사이비 지식인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자들의 특징이다",
"이데올로기 추종자들은 고집이 세고 융통성이 없다"와 같은 식의 발언은 본인 역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만일 자본주의나 자유주의를 예시로 들었다면 어땠을까? 책이 좀 덜 팔리지 않았을까?
저자가 첫 번째 챕터의 주장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공산주의와 대척점에 서있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주의점에 대해서도 함께 언급했어야 옳다. 그렇지 않고 한쪽의 사례만 가져다 쓴 것은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확장하겠다는 의지의 발현이자 출판물의 경제적 이익을 고려한 판단이었다는 생각을 한다면 너무 과한 해석일까?
추상의 향연
전반적으로 읽어내기 힘들었다. 독자의 가독성을 위해 저자가 쉽게 활용할 수 있는 글쓰기 전략은 생각(개념) + 사례(구체화)이다. 한데 이 책은 작가의 생각을 구체화하는 사례가 부족하다. 생각을 너무 길게 풀어내고 있으며 그 생각을 보완하기 위해 생각을 연달아 제시하기 때문에 읽어내는 내내 피로도가 높아진다. 말 그대로 추상의 향연이다.마치 450쪽짜리 산문시를 계속해서 읽어나가는 느낌이다.
시가 산문과 구별되는 가장 큰 핵심적 요소는 초고밀도의 압축적인 표현과 비유, 그리고 짧은 양이다. 글이 매력적인 이유와 시가 매력적인 이유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언어유희를 통한 재미와 생각지 못한 상상력은 글과 시의 공통적 매력 포인트다. 하지만 글과 달리 시가 더욱 도드라져 보일 수 있는 지점은 음절의 양이 산문과 비교해 절대적으로 적고 그렇기 때문에 간결하지만 압축적인 의미를 곱씹어 낼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함에 있다.
글을 시처럼 쓴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문장마다 은유와 상징과 추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시를 읽듯 음미하며 읽어야 할 것 같은 문장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문제는 그것이 450쪽에 달한다는 것이다. 완독하는데에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하다.
저자가 두 번째 챕터에서 강조했듯 원형적 이야기에 몰두해있기 때문인지 개념을 보완하기 위한 사례로 제시하는 이야기들조차 종교와 신화에 국한되어 있다.
종교와 신화는 구체적 사례를 담은 스토리라기보다 압축되고 정돈된 개념에 가깝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개념을 설명하고 보충하기 위해 사례를 제시할 때에는 사례에 대한 부연 설명이 길어져서는 안 된다. 개념을 이해하기 어려워 사례를 제시하는 것인데 사례가 개념인지라 그것을 또 설명하고 있으니 독자는 인지 과부하에 걸릴 수밖에 없다. 개념과 추상이 가득 찬 퍼레이드와 같은 이런 류의 글은 밀도가 있고 함축된 생각이 많아 차분히 공을 들여 읽어내기만 한다면 엄청난 양의 지혜를 전수받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방식의 독서를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대중 서적으로 어떻게 성공을 했는지 의아하다. 어쩌면 대중의 문해력이 상당히 높아졌다는 것을 반증하는지도 모르겠다.
챕터명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으나 그것을 설명하는 내용 사이사이에 고개를 갸웃거리게 되는 기이한 경험을 하였다. 총론과 각론의 부조화. 개념과 사례의 이질감을 느끼며 유명세에서 비롯되는 권위에 압도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던 시간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즐겁고 유익한 것에 몰두하자는, 요 근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가치관 때문인데 억지로 이해가 안 가는 것을 저자의 유명세 때문에 꾸역꾸역 읽어가는 것이 고통스럽고 나에게 그다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높은 밀도의 책을 내가 아직 소화해낼 만큼의 역량을 갖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너무 그렇게 자책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수준이 부족해서 이해를 못 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어쨌든 지금 나에게 무용하면 그것이 천만금의 가치를 가졌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책 보다 유튜브에서 훨씬 유명한 사람이기에 조던 피터슨이라는 사람이 궁금해지긴 했다. 유튜브를 통해 그를 더 알아가고 싶다. 책의 내용은 이해하기가 영 어려웠으나 글보다 말로서 그의 생각을 전해 듣는다면 조금 더 명료하고 간결하게 그의 생각을 접할 수 있을 것 같다. 적도 많지만 그 반대편에는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만큼 존경하는 사람도 많다는 조던 피터슨이기에 그의 어떤 생각이 사람들을 그토록 강력하게 자극하고 끌어당기는지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