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암살에서 친일파를 연기한 배우 이정재는 독립군에게 마지막 처단을 당하는 순간, 왜 그랬냐는 독립군의 원망 서린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몰랐으니까! 이것이 흑역사가 생성되는 근본적 원인이다. 그때는 그게 최선의 선택인 줄 알았으니까! 일이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냐고!!!
"101가지 흑역사로 읽는 세계사"는 그런 의미에서 일이 이렇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을, 역사의 중요한 갈림길의 순간에 선택권을 쥐고 있던 사람들이 빚어내는 좋지 못했던 선택들을 두고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땠을까라는가정으로 시작한다.
전쟁에서는 언제나 일이 틀어지기 마련이다. 그것은 바로 마찰이라고 불리는 현상 때문이다. 마찰은 작은 어려움이 축적되는 것이다. -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
클라우제비츠가 제시한 마찰이라는 개념은 이 책을 관통하는 핵심적 개념이다. 모든 흑역사는 아주 작은 어려움들과 변수들이 모여 발생시킨 마찰의 결과물이다. 마찰은 변수다. 변수는 모든 상황에서 늘 발생한다. 언제나 변수는 발생하기 때문에 변수를 줄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상황을 축소하는 것뿐이다. 즉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의사결정을 통해 복잡함을 제거하는 것만이 마찰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단순하게 살라. 이것은 전쟁 상황에서도, 개인의 삶에 있어서도 통하는 절대적 진리였던 셈이다.
이 책은 제목처럼 세계사에 능통한 사람이 아니어도 살면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만한, 현대 세계사를 관통하는 큼직한 사건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1차 2차 세계대전, 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와 영국의 몰락, 베트남 전쟁, 걸프전, 노르망디 상륙작전, 수에즈 운하, 이란과 이라크가 핵보유국이 된 과정, 사담 후세인과 알 카에다 그리고 isis의 탄생과 같은 국제사회의 큼직한 이슈들이 발생하게 된 원인과 진행 과정, 그리고 그러한과정을 거치며 국가 간 힘의 균형이 변해가는 모습을 통해 현대에 이르는 각국의 모습들을 살펴보며힘의 균형이 어떻게 이동하게 되는지, 그리고 그 거대한 흐름의 뒤편에 얼마나 예상치 못했던 변수들이 작용하고 있었는지 세세하게 풀어낸다.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인상 깊었던 것을 하나 꼽자면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비화 이야기를 꼽고 싶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의 노르망디 해변에 미국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대규모 상륙작전을 진행한다. 일분일초를 다투는 긴급한 상황 속에서 독일은 무슨 여유를 부리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당시 독일군 총사령관이었던 롬멜 장군은 아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독일 본국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게다가 긴급상황을 보고받고 중요한 결정을 내렸어야 할 히틀러는 평소 불면증으로 인해 잠을 못 이루기 일쑤였는데, 하필 그 순간 달콤한 낮잠에 빠져있었다. 문제는 그의 괴팍하고 예측 불가능한 성격 탓에 아무도 감히 잠자는 사자를 낮잠에서 깨울 엄두를 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전 세계를 뒤흔들 최악의 전쟁에 종지부를 찍을 결정적인 원인이 낮잠과 로맨스였다니, 정말 인간이 최대의 변수라는 말이 기가 막히게 입증되는 순간이다.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지나간 역사를 되돌아보고 실패에서 교훈을 얻는 일은 중요하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고 싶은 인간의 기대를 충족시킬 수 있는 행위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E.H 카는 "역사란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사실을 기록한 역사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고 그것을 통해 현재의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나아갈 것인지 생각해보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말일 테다. 그런 의미에서 순간의 잘못된 선택과 예상치 못한 변수 때문에 만들어진 흑역사를 되짚는 일은 분명 의미 있는 작업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어찌 생각해보면 역사는 이미 벌어져버린 일이기도 하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저랬다면 어땠을까 하는 식의 가정은 소설을 읽는 것과 비슷한 종류의 재미를 줄 수는 있을지 모르겠으나 다소 무의미하다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결과론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답을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랬으면 더 좋았을 텐데...라는 가정은 후회와 미련과 같은 종류의 감정의 파동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역사란 한 가지 사건을 통해 결정될 만큼 단순한 움직임이 아니다. 이미 벌어진 일들을 주욱 나열해놓고 한 두 가지 변수를 뒤바꾼다고 해서 내가 예상한결과가 나타날까? 그 뒤바꾼 일들 사이에서 새로운 변수가 튀어나올 것은 자명한 일이다. 예를 들어 뮌헨 협정에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에게 매료되지 않은 채 강경한 자세를 취했으면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예상하는 것은 변수의 존재를 너무 단순화한 결과에 불과하다. 변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면서 무수한 변수의 변수들을 무시한 채 단일 변수에 너무 커다란 의미를 부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결과를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이랬어야 했다 저랬어야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는 얼마나 쉬운 일인가. 과거를 후회하는 사람을 비웃는 말로 껄무새라는 용어가 있다. 그때 그렇게 할걸 저렇게 할걸 껄껄껄...
우리 인생의 최대 문제는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선택을 하기로 결정했을 때 그 앞에 어떤 변수들이 기다리고 있는지, 또 다른 내가 알지 못하는 어떤 곳에서는 나의 선택에 저항을 가져올 어떤 선택들이 진행되고 있는지 절대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돈을 버는 애널리스트가 적은 것이고 게임을 못하는 게임 해설가가 있는 것이고 전 국민이 축구 전문가, 정치 전문가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지나간 뒤에 말하는 것이나 결정권이 없을 때 떠드는 일은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손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게 그런 의미였어? 아~ 그게 그런 거였어? 그럴 수도 있었겠구나! 그랬다면 정말 그럴 수도 있었겠네!
정사에는 드러나지 않았던 뒷 이야기, 그리고 색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려는 시도는 늘 짜릿하고 재미있다. 다만 정사를 알고 있을 때에 한해 그렇다. 정사를 알지 못한 상태에서 야사를 들어봐야 미처 알지 못하고 놓쳤던 사실들을 새로이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전혀 새로운 사실로 다가오기 때문이다.야사에 앞서 정사를 공부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선택지가 존재하는 이상 흑역사는 늘 발생할 수 있다. 어떤 선택이 되었건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개인의 선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흑역사가 없는 사람이 있을까. 흑역사가 없다는 것은 모든 선택에서 최선의 선택을 골라냈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불가능하다. 미래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 어떤 흑역사를 생성하는 중인가. 어떤 결정을 내려야 흑역사를 피해 최선의 결과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인가. 끊임없이 고민만 하다가 가는 것이 인생인가. 흑역사에 관한 책을 읽으며 애먼 생각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