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들은 오감을 통해 세계에 대한 지식을 획득한다. 만져보고 맛보고 쳐다보며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 자신과 외부 환경의 관계성을 파악하고 특정한 대상의 존재를 흐릿하게나마 규명해 나간다.
이렇게 우리는 태초에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했었다. 하지만 성장을 하면 할수록 점차 감각보다는 이성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정의 내리는 것에 익숙해진다. 그것은 품이 덜 드는 효율적인 방법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위험성이 적어 생존에 보다 유리한 방식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매번 감각을 통해 세상을 인지하려 한다고 생각해보자. 얼마나 많은 시간이 투입되어야 할 것이며 때로는 목숨을 위협할 만큼 위험한 일이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을지 어렵지 않게 상상해낼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감각보다 이성으로 세상을 인지하기 시작하는 보다 큰 이유는 효율성과 안전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기쁨을 느끼는 역치가 높아졌기 때문이다. 역치란 생물이 외부 환경의 자극에 대해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뜻한다. 예를 들어 맥주 한잔으로도 기쁨을 느끼는 사람과 맥주 5병은 마셔야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을 두고 후자가 전자보다 맥주로 인해 기쁨을 느끼는 역치가 높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나이를 먹을수록 거의 모든 분야의 경험치가 쌓여간다. 사람에 따라, 환경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여 오감의 경험은 늘어간다. 삶의 환경이 크게 뒤바뀌지 않는 이상 그 맛이 그 맛이고, 본 것을 또 보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역량 안에서 반복적인 감각을 추구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렇기 때문에 삶이 일정한 궤도에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으면 인간은 감각의 추구에 소홀해지게 된다. 자신의 역량 안에서 충족할 수 있는 감각의 기대치를 이미 거의 채워보았기 때문이다.
한 끼에 만 원짜리 식사에 익숙한 사람은 한 끼에 백만 원을 호가하는 유명 셰프 오마카세를 즐기기 어렵고, 평생 해외여행을 한 번도 떠나본 적 없는 사람은 제주도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것도 어려운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스로에게 가끔 선물을 하는 행위는 나름의 의미를 갖는다.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도 평소에 접해보지 못했던 음식, 공연, 문화, 사상 등 이질적인 경험을 자신에게 제공하는 행위는 오감의 범위를 확장시키는 생산적인 활동이다. 기쁨을 위한 감각의 추구가 결국 자본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일정 부분 그러한 구조 속에 있다는 것 또한 부정할 수는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제 어찌해야 할까. 분수를 알고 수준에 맞는 소비 내에서, 결국 가성비에 의존하여 안분지족의 삶을 살아가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라는 것일까.
목표 지점에 도달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다. 첫째 목표에 도달한다. 둘째 목표를 수정한다. 셋째 비슷하지만 다른 목표를 설정한다.
즐거움을 위해 감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목표라고 한다면 위에서 말한 방법론에 의해 목표 달성을 위한 세 가지 전략 수립이 가능하다.
첫째. 감각을 추구한다.
둘째. 감각추구가 유일한 즐거움의 척도가 아니니 정신적인 만족으로 우회한다.
셋째. 감각 추구를 새롭게 정의한다.
첫 번째 방법은 앞서 이야기한 자본주의적 관점에 종속된다. 즉 추구할 수 있는 감각의 종류에 자본적 위계가 있고 그것은 반드시 한계점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고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 방식으로 오감을 충족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두 번째 방법은 자기기만이 될 수 있으며 반쪽짜리 만족감에 불과하다. 인간은 육체적 만족과 정신적 충족을 동시에 추구하는 존재다. 그런데 오감의 만족을 뒤로한 채 정신적 만족만으로 삶을 영위하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한쪽 다리로 일어서려 하는 것과 같다. 위태롭고 불안하며 외부의 작은 충격으로도 언제든지 쓰러지기 쉬운 상태로 버티고 서있는 셈이다.
결국 세 번째 방법으로 가는 수밖에 없다. 감각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만의 주관적 세계를 구축해야 한다. 매일 보던 꽃을 보면서 새로움을 느낄 수 있는 사람, 매일 먹던 밥을 먹으면서 미세한 차이를 발견해낼 수 있는 사람, 매일 같은 일을 하면서도 의미와 기쁨을 부여해 낼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혹자는 이런 행위를 두고 정신승리 혹은 자기 위안이라고 냉소적인 태도를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는 결코 객관적이지 않다. 우리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주관의 세계에서 살다가 간다. 그것을 빨리 캐치해낸 사람만이 하루라도 빨리 인생을 기꺼이 즐길 수 있게 된다.
빵집 옆을 지나가다가 갓 구워져 나오는 빵 냄새를 잠시 음미해 보았거나 꽃집 옆을 지나다가 싱그러운 꽃 향기에 발걸음을 멈춰본 사람들은 안다. 순간의 감각에 몰두하는 시간이 빚어내는 놀라운 기쁨의 영속성을. 그것은 단지 그 순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한 장면으로 남아 두고두고 기쁨을 선물하는 의미 있는 축적의 시간이 된다. 우리는 의도적으로 감각의 날을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마주하는 작은 것들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아마도 잘 사는 방법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