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을 하다가 뺨을 한 대 쳤다

내 안의 패러다임

by 정 호

손가락 끝이 며칠째 답답한 느낌이 들어 하도 운동을 안 해 이제 드디어 피가 너무 끈적해진 것은 아닌가 걱정되는 마음에 산책을 나섰다. 그렇게 걷고 뛰기를 반복하다가 숨이 차올라 때마침 눈앞에 보이는 정자에 앉아 잠시 쉬고 있었다. 뛸 때는 들어오지 않던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그제야 하나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가만히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차려입은 옷차림이 모두 비슷했다. 거의 대부분은 트레이닝복과 운동화, 패딩점퍼를 색깔만 다르게 조합한 차림이었다. 그중 간간히 코트와 목도리, 멋들어진 모자로 한껏 멋을 내고 "파워 워킹"이 아닌 "슬로 워킹"을 시연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산책 코스로 삼은 곳은 도심 한복판이라고 보기 어려울 만큼 한적하고 고요한 도심 속 숲이었다. 새소리, 물소리, 간혹 지나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는 고요한 숲. 이곳은 지역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미 유명하여 평일 낮임에도 불구하고 어르신들의 발걸음을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운동복 차림이 아닌 평상복 혹은 조금이라도 멋을 부린듯한 복장으로 걷고 있는 사람을 보며 나도 모르게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산책은 곧 운동이라는 패러다임이 고착화되었다는 사실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숲길을 걷기 위해 나온 사람들이 모두 운동을 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을까? 오래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당연히 답은 "아니오"임이 분명하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나는 코트를 입고 목도리를 두른 채 산책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편협함에 사로잡혀 있단 말인가.


패러다임


문득 어제 철학수업에서 나온 토마스 쿤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을 "사고방식의 틀"을 제공하는 어떤 원천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우리 시대를 관통하고 있는 대표적인 패러다임은 자본주의, 과학만능주의 같은 것들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옳다고 믿고 있으며 새로운 생각을 완강하게 거부하게 만드는 기존의 기득권적인 사고의 틀을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코페르니쿠스적 발견"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기존에 천동설이 패러다임이었던 시대에 지동설을 주장하여 완전히 새로운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을 꾀할 만큼 혁명적인 발견, 혹은 생각의 전환을 예찬하는 표현이다. 그만큼 패러다임을 바꾼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일이다.


패러다임은 시대를 타고 흐르며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기도 하지만 인간 개개인은 자신만의 패러다임(어떤 식으로 사고하게 만드는 생각의 근원, 혹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 어떤 이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뜻이라는 종교적 믿음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고, 다른 이는 행복이란 오직 나의 기쁨과 만족을 기준으로 설정할 수 있는 주관적인 것이라는 믿음으로 자신의 즐거움을 극대화하며 살아간다.


이렇게 삶 전체를 관통하는 커다란 믿음체계뿐만 아니라 소소하고 작은 믿음 체계들이 우리 머릿속에는 수도 없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때로는 편견, 때로는 미신, 때로는 과학으로 이름을 바꾸어가며 우리로 하여금 세상을 바라보게 만든다. 다시 말해 우리는 패러다임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등산하는데 웬 코트"라는 나의 생각은 "등산 = 운동"이라는 공식이 내 머릿속 패러다임이었던 탓에 발생하게 된, 내 안에 내재된 패러다임을 거부하자 나타난 반응이었을 테다. 참으로 편협하고 우습지만 우리는 수도 없이 많은 패러다임에 갇혀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간다.


어제 철학수업에서 들었던 이야기 중 기억에 남는 것이 하나 있다. 현시대를 관통하는 패러다임 두 가지를 제시하였는데 하나는 "인과관계가 옳다는 생각"이고 두 번째는 "무질서함은 나쁜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 두 가지 생각이 틀린 이유를 선생님은 철학적 개념을 토대로 열심히 설명했지만 내가 이해한 대로 겉핥기식으로 말하자면 삶이란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기에 인과관계에 매몰되기보다는 불교의 "인(원인) 연(조건)"이라는 개념이 삶을 설명함에 있어 더욱 적합하며 인연에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 바로 "무질서"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무질서란 대책 없고 무분별함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계획하지 않음과 새로운 자극으로의 끊임없는 노출 정도가 더 적당해 보인다. 이런 새로운 만남과 마주침들로 인해 새로운 연(조건)이 끊임없이 마찰, 발생하게 되고 그제야 인(원인)이 연(조건)과 맞아떨어질 때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는 단순히 원인과 결과를 일대일 매칭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복잡한 삶을 설명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임용에 합격해 갓 발령받은 초임 시절, 청운의 부푼 꿈을 꾸며 새로운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후배에게 적합한 조언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10년 언저리 즈음의 선배 교사들은 교사생활 5~7년 차에 접어들면 슬럼프가 온다고들 이야기했다. 그런 반면 20년 차 이상의 선배 교사들은, 그들도 분명 그런 비슷한 시기가 있었음이 분명할 텐데 슬럼프가 무엇이었는지 까마득하게 잊어버린 듯 자신만의 새로운 목표를 향해 저마다의 발걸음을 옮기느라 분주해 보였다.


배운 대로라면 10년 차 교사는 인과관계의 패러다임(왜 애들이 내 맘대로 안되지!? 내가 이렇게 잘해주는데! 내가 이렇게 애를 쓰는데! 내가 이렇게 진심을 다하고 있는데!)에 함몰되었던 탓이요, 20년 차 교사는 확률의 세계(교사는 하나의 원인에 불과하다. 수많은 연(조건)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에 눈뜬 덕일 테다.


나의 노력과 진심을 알아주지 않는 사람 앞에서 우리는 실망하고 서운해한다. 그것이 어디 교사가 학생을 바라볼 때에만 느끼는 마음이겠는가. 부부간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도, 친구와 동료 관계에 있어서도, 아마도 모든 인간관계에 공통으로 적용되는 마음일 테다. "내가 이만큼 했는데 왜 너는 안 해줘"라는 식의 마음가짐은 인과관계라는 패러다임에 매몰되었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류다.


삶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수많은 예측 불가한 변수들과 맞물려 내가 제공한 하나의 원인이 폭발할 때에서야 원하는 결과가 나오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변수들을 기다리며 우리가 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려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 "진인사대천명"이 괜히 나온 말이 아니다. 우리는 변수를 알 수가 없다.


패러다임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어느 시대에 진실로 믿어졌던 것들이 새로운 시대에는 낡은 것으로 치부된다. 천동설(태양이 돈다)과 지동설(지구가 돈다)이 그렇고 뉴턴의 고전 물리학(시공간은 불변적이고 절대적이다)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시공간은 가변적이고 상대적이다)이 그렇다. 이것은 거시적인 세계관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뿐만 아니라 미시적인 시각으로 한 인간의 삶을 주욱 펼쳐놓고 연대기를 그려봐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은 아닐까. 우리는 모두 어느 시절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각자의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었고 그 패러다임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해간다.


어떤 패러다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가. 그 패러다임은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인가 불행하게 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그 패러다임을 유지할 것인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교체할 것인가. 늘 선택은 자신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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