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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an 28. 2022

장례식장의 수많은 화환

네 멋대로 평가하지 마라

"이야 대단하네, 화환을 보니  살았구먼 그래. 국회의원 화환에 병원장 검사장 기업 대표들 화환까지 있는 걸 보니 생전에 어떻게 지내셨는지 훤하네, 가시는 길이 외롭지 않겠어."


나이를 한두 살 먹다 보니 결혼식장과 장례식장 등 애경사에 참여할 일이 늘어난다. 그중 장례식장은 분위기가 조용하고 엄숙한 경우가 많아 주위의 대화 소리를 의도치 않게 엿듣게 될 때가 있다. 그렇게 장례식장에서 간혹 들려오는 고인에 대한 이야기들 가운데 "외로움"에 대한 내용이 주제에 오를 때면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소재는 화환의 개수와 출처, 그리고 빈소를 지키는 가족들의 숫자와 방문객으로 인해 얼마나 인산인해를 이루는지가 주된 내용이다.


기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바로 화환, 가족, 방문객의 "양"이다. 화환이 얼마나 많이 전시되어 있는가, 빈소를 지키는 가족의 수는 얼마나 많은가, 방문객은 얼만큼인가를 통해 고인의 생전의 외로움을 측정한다는 것은 과연 제대로 된 측정 방식일까? 그들 사이에 대체 어떤 연관성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고인의 영혼과 정신의 외로움과 풍요로움을 출입구에 걸려있는 몇만 원짜리 근조화환의 개수로 쉽게 재단해버리고 마는가.


입구의 근조화환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이 많을수록 고인은 외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다. 평상시 고인과 가까이 지내며 고인의 부고를 듣고 버선발로 뛰어온 사람이 근조화환 따위를 바라보고 있을 겨를이 어디 있으랴.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킬 여유도 잃은 채 고인의 죽음을 확인하려 다급하게 뛰어 들어오는 이에게 근조화환이 대체 무엇이며 다른 방문객의 숫자를 헤아릴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자식이나 배우자의 지인들과 같이 고인과 직접적인 연을 맺지 않은 사람들, 혹은 가볍게 스쳐 지났던 인연들만이 찬찬히 식장을 둘러보는 관찰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장례식이라는 것이 온전히 돌아가신 분만을 위한 절차가 아님은 분명하다. 고인의 가족들의 참담하고 허망한 마음을 달래주기 위해 기꺼이 찾아오는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감사함을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다만 슬픔과 허망함이 가득한 장소에 와서 쇼핑을 하듯 음식이 어떻네, 화환이 초라하네, 빈소가 작네, 액자는 얼마짜리네 국화는 얼마짜리네 따위의 천박한 말을 내뱉는 일부 사람들의 대화가 귀에 꽂히는 날이면 역한 마음에 토악질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느라 안 그래도 힘든 장례식장 방문이 더욱 힘겹게 느껴진다.  


물론 별생각 없이 내뱉는 일상적인 대화라는 것을 안다. 나 역시도 이런 생각을 하기 전에는 무의식적으로 그런 식의 이야기를 뱉었을지 모를 일이다. 주무시다가 돌아가셨다니 호상이네. 그래도 병치레를 오래 하지 않고 돌아가셔서 다행이네 따위의 전혀 위로가 되지 않을 공허한 위로의 말을.


가족을 잃은 슬픔을 어찌 알까.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는 현명한 사람들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슬픔을 위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침묵하는 것이다. 허공을 떠다니는 방문객들의 무의미한 질문과 색을 잃은 위로에 일일이 응답하기엔 유족들은 이미 지쳐있다. 그저 손이나 한번 잡아주고 어깨나 한번 두드려주고 오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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