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 시인의 시 "꽃"의 한 구절이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기 전까지 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던 타자는 내가 관심을 가지고 그 존재를 호명하자 나에게 의미를 가진 존재가 되고 그 순간 타자와 객체는 내 삶에 깊숙이 파고 들어온다는,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그렇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는 내용의 시 한 소절은 관심과 사랑 그리고 시선에 대한 강력한 상징이 되었다.
서로를 사랑하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그 사랑과 관심을 따듯한 시선으로 구체화시키는 과정이 어찌 아름답지 않을까. 하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을 해보면 이것은 굉장히 인간 중심적일 뿐만 아니라 내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사고를 가능케 할 수 있는 생각의 밑바탕이 될 수도 있다.
내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다고 꽃이 꽃이 아니게 되는가? 내가 살펴주지 않았다고 태양은 태양으로 존재하지 않는가? 대부분의 존재들은 자신의 가치와 의미를 가진 채 제자리에 우뚝 서서 이미 스스로 빛나고 있었을 따름이다. 다만 인간의 눈으로, 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니 내가 관심을 두지 않고 내가 의미를 두지 않았던 존재들은 나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뿐이다.
아동발달이론 중에 대상 영속성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보이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을 뜻한다. 이론에 따르면 약 두 돌 전후로 인간은 대상 영속성을 획득하게 되며 물체를 어딘가에 숨겨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김춘수 시인의 시구절에 의하면 우리는 무언가에 관심과 사랑을 품고 의미를 부여해야지만 의미의 영속성을 갖게 된다.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줄 때에서야 의미는 나의 가슴과 삶 안으로 파고 들어와 그제야 실존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모든 객체의 존재 의미는 적어도 나에겐 영속적이지 못하게된다.
나의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것이 의미 없는 존재 일리 없다. 다만 나의 세상 안에서 의미가 없었을 뿐이다. 인간은 태어나면서 부모와 눈을 맞추고 나와 타인 간의 관계성을 확립한다. 그리고 자라나면서 점차 관계성을 늘려가며 의미 있는 존재의 양적 확장을 이룩한다.
나이를 먹어가며 인간이 맺는 의미 있는 관계의 범주는 같은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식물과 동물, 돌과 같은 무생물, 책이나 종교와 같은 사상적 토대들, 심지어 자신이 하는 일이나 이미 죽어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과도 의미 있는 관계를 맺어나갈 수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언을 끊임없이 되새기며 삶의 중요한 지침으로 삼거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돌덩어리를 바라보며 혼자서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기도 하는 것이 인간이다.
도대체 무슨 까닭에 인간은 거의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하려 애쓰는 것일까.
의미를 부여하길 좋아하는 이유를 긍정적인 차원에서 찾아보자면 삶의 동력이 되어주기 때문이고 부정적인 차원에서 찾아본다면 무의미한 행위는 무용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부정적 차원에서 의미를 찾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의미가 없는 것은 곧 무용하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용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게 다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의 알고리즘을 생각해보자. 무용한 것은 무의미하고 유용한 것은 유의미하다는 생각, 즉 이러한 생각은 인과관계와 이해득실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고의 과정에 그 뿌리를 둔다. 어떤 행위로부터 발생하는 결과가 어떠한 형태로든 개인에게 유의미한 결과물을 가져다줄 때, 행위는 의미를 갖게 되고 유용해진다. 반대로 개인에게 무의미한 결과를 가져올 때 행위는 의미를 찾을 수 없는 무용한 짓거리가 되어버리고 만다. 즉 이런 사고의 과정 안에서는 효율이 떨어지고 성과가 없는 일체의 것들이 의미 없는 것들이 될 확률이 높다. 아니 거의 확실히 그렇다.
이번에는 긍정적 차원에서 의미를 찾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사람은 의미 없는 행위를 반복하면서는 결코 생을 건강하게 이어나갈 수 없다.아니 어쩌면 의미를 찾지 못하는 인간은 존재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를 생각해보자. 무인도에 표류한 주인공은 혼자서 살아남기 위해 꾸역꾸역 애를 쓴다. 그 발버둥을 끝까지 지속시킬 수 있었던 힘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영화에서 도드라지게 나타나는 주인공에게 의미 있는 존재는 다름 아닌 윌슨(배구공)이다.
사람도 아니고 심지어 동물도 아닌 피 묻은 배구공을 인격화시켜 의지하고 화를 내는 주인공이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겐 미쳐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일상을 조금만 벗어나서 생각해보자.
혼잣말을 해본 경험이 없는가? 우리는 가끔 혼잣말을 한다. 아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는 혼잣말을 도대체 우리는 왜 하는 것일까.무의식 중에 우리의 생각과 감정을 발산하게 되는 것이다. 설령 들어줄 사람이 없더라도 이런 상황을 통해 우리는 늘 주고받는 피드백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혼자서 영어공부를 할 때 특정 상황을 떠올리며 문장을 중얼거리거나 복싱을 배울 때 혼자서 가상의 상대를 생각하며 주먹을 뻗고 피하며 연습하는 행위 둘을 가리켜 동일하게 "쉐도잉"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실존하지 않지만 가상의 존재를 상정하는 이런 행위 역시 일시적인 의미를 자체적으로 부여하는 것과 같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윌슨에게 인격을 부여하였듯 우리 역시 일상을 더 잘 살아내기 위해 의미를 부여한다. 남들이 하찮아 마지않게 생각하는 일일지라도 본인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숭고하고 거룩한 업으로 탈바꿈한다. 남들이 아무리 부러워하고 칭송하는 일을 하고 업적을 쌓을지라도 본인이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 행위는 오래 지속되기 힘들다.
인간이 끊임없이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고 확장하고 만들어내는 이유는 삶의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누군가가 물어올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가장 커다란 의미를 가진 존재를떠올린다. 그 존재는 가족과 같은 인격체일 수도 있고 어떤 성취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건 어쨌든 나에게 커다란 의미가 있는 어떤 것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다.
그래서 의미를 찾지 못한 삶은 위태롭다. 살아갈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와 같은 질문을 사춘기에만 던지는 치기 어리고 유치한 생각들로 치부해서는 안된다. 삶이 위태로워지는 순간, 삶은 무섭고 날카롭게 나에게 질문을 던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 물어오는 질문에 제대로 답하지 못한다면 생은 허무하리만치 쉽게 휘청거릴 것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