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섦을 품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by 정 호

영화 콘택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투쟁, 민노총, 전태일, 노동 운동, 열사 이런 단어들이 오롯이 피부에 와닿기에는 시간이 조금 흘러버렸다는 핑계를 대기에 적당한 2000년대 중후반에 대학을 다녔다. 2010년을 코 앞에 둔 그 시절의 대학가에서는 민주화 운동이나 노동 운동처럼 어떤 거대한 헤게모니 투쟁을 주요 화두로 삼아 대학 생활을 불태우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런 시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 운동에 빠져있던 선배가 있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집회에 참여하고 후배들과 술을 마실 때면 늘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담론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으며 경쟁, 승리, 자본, 개발, 수월성교육, 엘리트주의와 같은 개념들보다는 복지, 나눔, 보편교육, 사회적 약자 등의 단어를 더 자주 입에 담던 사람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그 선배와는 연이 끊어져 더 이상 그의 생각을 접할 수 없게 되었고 원래도 그랬었지만 그 사람의 삶은 나와는 완벽하게 무관한 것이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인만큼 무엇이든 변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연히 sns를 통해 접한 그의 삶은 내가 이전에 알던 그의 삶과는 너무도 달라져 있었기에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을 순간적으로 염두에 두지 못할 만큼 그 변화의 폭에 상당히 놀랐던 기억이 난다.


노동자와 보편적 복지, 사회적 평등에 목청을 높이던 20대 청년은 마천루와 자유시장을 찬양하는 40대 자본가가 되어 있었다. 실제로 자본가가 되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본의 달콤함에 흠뻑 취해있는 듯한 발언들로 도배된 그의 sns를 바라보며 십오 년의 세월을 건너오며 너무나도 달라진 한 사람의 내면을 마주한 것 같아 당혹감을 느꼈다.


그 사람을, 자본가적인 사고 패턴을 비난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나 역시도 매 순간 변하는데 사람이 변하는 것을 두고 어찌 비난할 수 있을까. 나 역시도 자본이 달콤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는데 어찌 자본을 예찬하는 사람을 비난할 수 있을까. 환경이 바뀌면 생각 또한 바뀌기 쉽다는 것은 이미 경험적으로 깨닫게 된 사실인데 더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을까. 다만 너무도 극단적으로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단박에 건너뛰는 한 사람의 영혼을 바라보며 어떤 계기로 그렇게 큰 폭의 변화가 가능했던 것일까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는 영화로 제작되어 국내에서 "컨택트"라는 제목으로 2016년도에 개봉했다. 외계인이 침공하여 그들을 무찌른다는 흔해빠진 영웅주의적 스토리의 SF영화가 아니라 "소통"이라는 주제를 풀어내기 위해 SF적 요소를 끌어다 쓴 이 작품은 이질적인 존재와의 소통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영화 콘택트에 등장하는 외계인은 오징어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다. 영화 상에서는 이 외계인을 다리가 7개인 까닭에 그리스어로 7을 뜻하는 Hepta와 발을 뜻하는 pod를 합친 조어로 헵타포드라 명명했다. 이 외계인은 눈이 정면을 바라보지 않고 동서남북 상하좌우 사방을 동시에 바라보고 있으며 그들의 언어는 순차적인 문법구조를 띄지 않고 원형적이면서 동시다발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작가는 이런 신체적 구조 그리고 언어적 구조를 바탕으로 외계인들이 과거, 현재, 미래에 이르는 선형적 시간의 흐름을 동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논리의 바탕으로 사용한다. 또한 눈이 앞뒤 좌우를 동시에 바라보고 있기 때문에 외계인의 사고체계에서 "정면"이라는 단어는 인간이 생각하는 "정면"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외계인의 '문자'와 '생물학적 특징' 등 여러 가지 시각적인 장치를 이용하면서 결국 작가가 하고픈 말은 지성을 가진 존재의 사고 체계는 어떤 구조(사용하는 언어, 생물학적 구조 등)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외국에 나가면 국내에 있을 때보다 자유로움을 느낀다고 말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언어에 있다. 쉽게 말해 한국어에는 각종 높임 표현들이 있지만 영어는 모두 YOU라는 것이다. 심지어 같은 사람들과 대화를 할 때에도 영어로 대화를 할 때와 한국어로 대화를 할 때 전혀 다른 분위기가 형성된다는 것은 우리의 사고체계가 언어의 영향을 받는다는 것을 방증하는 좋은 사례가 된다. 언어가 사고를 지배한다는 이론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로 무지개를 몇 종류의 색으로 인식하는지 사용하는 언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 7가지 색으로 인식하고 구분하지만 미국 사람들은 빨주노초파보 6가지 색으로 인식하고 구분한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그리고 영화의 흐름대로라면 인간의 사고체계는 구조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보자. 자신이 처한 환경을 구조라고 한다면 이는 영화와 딱 맞아떨어지는 이야기가 된다. 영화에서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에 따라 생각의 구조가 달라진다고 했듯 인간은 처한 환경에 따라 사고 체계가 재구조화된다.


앞서 이야기한 선배의 구조(환경)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다. 20대에 그를 둘러싼 구조와 40대의 그를 둘러싼 구조는 전혀 다른 것이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다면 큰 폭의 사고의 변화는 큰 폭의 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의 사고 체계가 어떤 방향으로 변화되었건 그것은 중요치 않다. 그런 변화를 만들어낸 그를 둘러싼 구조가 그의 인생에 긍정적으로 작용했기를 바랄 뿐이다.


영화를 보며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부분은 전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주인공(인간)과 외계인의 대화 장면이었다. 완전히 새롭고 이질적인 존재인 외계 생명체를 해석하기 위해 파견된 언어학자였지만 영화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녀의 소통을 위한 노력은 단순히 직업적 소명의식에서 비롯된 것처럼 보이지만은 않았다. 그보다는 낯선 존재에 대한 규명. 알아가고 싶다는 희망 같은 것들이 보였다.


영화는 인간과 외계인이라는 완벽히 이질적인 존재간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것은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해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외계인을 이해해보려는 노력이 아름다워 보이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 가장 잘 알고 있는 인간이라는 존재를, 특히 가까이 지내는 존재에게 오히려 그러한 이해심과 호기심을 발휘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낯선 존재를 맞닥뜨렸을 때에만 최대의 이해심을 발휘해서는 안될 일이다. 어쩌면 최대의 이해심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존재, 이미 익숙하다고 생각하는 존재 앞에서 더욱 발휘되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언제나 "헵타포드"일 수밖에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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