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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Apr 05. 2022

소음에 휘둘리지 않기

중요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들

한 교실에 10명 내외의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근무를 하다가 한 교실에 30명 가까이 되는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로 근무지를 옮겼다. 한눈에 10명을 담고 있던 때와 30명을 담아야 할 때, 그 둘 사이에는 꽤 커다란 차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매일 몸소 체험하는 중이다.   


사람이 많은 곳은 언제나 소란스럽다. 초등학교 교실도 예외는 아니다. 아직 어려 다듬어지지 않았기에 조금은 투박하고 원형적인 형태로 그들의 본질을 드러낸다는 것이 성인들이 모여있는 집단과의 차이라면 차이일 테지만 갈등과 화합, 정의와 부정의가 끊임없이 생동하는 현실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런 아이들과 함께 정신없이 생활을 하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시선을 빼앗기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목소리가 큰 아이, 애교가 많은 아이, 특출 난 재능이 있는 아이, 무리 지어 다니는 아이들, 사고를 치는 아이, 떼쓰는 아이, 우는 아이, 먼저 다가와 말을 거는 아이, 감정 조절을 어려워하는 아이, 웃음이 많은 아이, 남의 일에 온갖 간섭을 하는 아이, 언제나 자기 말이 우선인 아이, 폭력적인 아이, 욕을 입에 달고 사는 아이, 듣기보단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


이런 아이들의 공통적인 속성은 소란스럽다는 점이다. 이때에 "소란"의 의미는 단순히 청각적인 범주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자극을 발산하여 타인으로 하여금 시각과 청각을 빼앗아가는 행위를 자주 하는 아이들. 어쩌면 소란이라는 말보다는 강한 자극을 외부로 자주 방출하는 아이들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합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아이들을 편의상 "방출인"이라고 하자.


우리는 보통 방출인들에게 시선을 준다. 아니 시선을 준다기보다는 빼앗긴다. 이것을 자발적 의지라고 보기엔 어렵다. 뜨거운 라면 그릇을 손으로 움켜쥐었을 때 나도 모르게 빠르게 손을 떼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이를테면 자극에 의한 무조건 반사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소란과 자극에 오감을 강탈당한다. 그것은 순간적이고 즉각적이며 위험한 신호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소음은 주의를 기울여서 피해야만 하는 생존과 직결된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고 적응을 위해 촉을 곤두세워야 하는 기민성이 필요한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에게 육체가 존재하는 이상 우리는 소음에 자동적이면서 즉각적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도록 세팅된 셈이다.


그와 반대로 적막한 아이들이 있다. 적막함은 무언가 텅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떤 일도 일어날 것 같지 않고 위급하거나 다급하지 않으며 그저 변치 않고 그 자리에 언제까지 그대로 머물러 있을 것만 같은 까닭이다. 그래서 우리는 온갖 종류의 부동의 고요함에 대해 냉정하리만큼 시선을 줄 여유를 부리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히려 여유를 부려도 될 일이라기보다 다급하게 진행시켜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대부분의 거대한 몰락은 늘 고요의 품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고독하고 조용한 아이의 세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놓치기가 쉽다. 그들은 방출하지 않고 수렴하는 까닭이다. 자극적이지 않고 밍밍한 까닭이다. 눈코 뜰 새 없이 정신없이 흘러가는 교실 안에서 고요한 아이에게 눈길을 주는 행위는 의식의 힘이 자극의 힘을 넘어설 수 있을 때에서만 가능하다. 그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자극은 언제나 우리 주변에 펼쳐져 있고 쉴 새 없이 우리 안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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