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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잡다. 걷잡다.

단어의 의미 구분 지어 사용하기

by 정 호
겉잡다 : 대강 짐작하여 헤아리다.
걷잡다 : 손안에 틀어쥐다. 거두어 잡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들을 겉잡으며 제대로 헤아리지 못한 채 수많은 것들을 놓치고 또 어떤 것들을 무던히도 애를 써가며 걷잡으려 하는 것일까.


글의 종류에 따라 다르겠지만 글을 쓴다는 것은 어쩌면 세상을 겉잡아보겠다는 무모한 시도로 볼 수도 있겠다. 본인의 감상이나 지식, 개인의 경험과 같은 인간의 인식에 해당하는 것들은 본디 세상에 존재하는 그 자체의 것들과는 반드시 얼마간의 간격이 존재할 테니 말이다.


하지만 사물 그 자체와 그것을 인식하고 해석하는 인간의 지력 사이에 피치 못할 이격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글이라는 행위를 통해 세상을 겉잡아보려는 노력은 그것의 맞고 틀림을 떠나 박수를 쳐줄만하다. 그것은 자신과 후손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자 새로운 세계의 창조이며 우리 삶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와 미래가 모두 응축되어 있는 하나의 점인 셈이다.


하지만 겉잡는다는 말은 이처럼 어쩔 수 없는 상황 안에서 최선의 노력일 때 사용되기보다는 가볍고 대수롭지 않게 무언가를 쉽게 판단할 때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런 종류의 겉잡음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들을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린다.


첫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첫인상을 내어주는 사람의 다양성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첫인상에 사로잡혀 새로운 모습을 관찰하지 않으려는 관찰자의 게으름과 편협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한 번의 만남으로, 한 번의 이야기로, 한 번의 표정으로 그 사람의 어디 즈음까지 우리는 짐작할 수 있을까. 첫인상이라는 말이야말로 겉잡음의 대표 격이라 할 수 있다.


혈액형과 MBTI 역시 겉잡음의 대유행이다. "혈액형이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에서 "MBTI가 어떻게 되세요?"라는 질문으로 형태가 바뀌었지만 두 질문은 사실 동일하다. 몇 가지 툴을 이용해 너를 쉽게 재단해 보겠다는 극대화된 편의와 효율성을 바탕으로 한 관계 맺음에 지나지 않는다.


16종류의 MBTI 형태를 외우기 귀찮았던 모양인지 종국에 가서는 E인지 I인지를 묻는 것으로 질문의 범위는 좁혀진다. 넷 중 하나였던 혈액형 분류에서 열여섯 중 하나인 MBTI로 진화하는가 싶더니 결국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양자택일로 선택의 폭이 좁아지다니... 이 정도까지 겉잡아도 될까 싶을 정도로 겉잡는데 익숙하고 능숙해진 우리의 모습은 어쩌면 타인에 대해 관심을 보일 수 있을 만큼의 여유와 너그러움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허술한 겉잡음 속에서 우리는 어떤 것들을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늘 장님 코끼리 만지는 식으로 겉잡고만 있으면서 모든 것을 걷잡고 있다고 착각하며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그것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걷잡을 수 없는 후회와 환멸이 나를 휩쓸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바쁘고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겉잡음은 분명 존재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도저히 아무것도 걷잡을 수 없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겉잡아야만 걷잡을 수 있을 때가 있고 겉잡지 않아야 걷잡을 수 있을 때가 있다. 그 두 겉잡음과 겉잡지 않음 사이를 현명히 오갈 수 있을 때 원하는 것을 걷잡을 수 있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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