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에 몰두하던 사람이 극도의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 육체적으로 기력이 소진되어 우울증이나 무기력증 따위에 빠지는 현상을 두고 번아웃 증후군이라 칭한다. 요즘 번아웃에 빠졌는지 모든 것이 다 재미가 없고 귀찮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정도로 일에 몰두해본 적 있느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자신 있게 그렇다고 답할 만큼 스스로 본업에 충실한 시간을 보냈다고 용기 있게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자신을 소진시킬 정도까지 밀어붙여 본 것도 아니면서 무슨 번아웃을 운운하느냐는 핀잔을 들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이런 말을 꺼내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 되어버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번아웃의 의미가 탈진, 소진이라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을 생각해봤을 때 번아웃이라는 것이 꼭 열정을 다해 나를 태워버린 후에서만 찾아오는 것은 아님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타오르는 불꽃을 바라보며 그 영롱한 불꽃이 꺼지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랐던 청소년기 캠프 파이어의 한 장면을 상상해보자. 장작의 불꽃은 땔감이 되는 나무들이 모두 제 몸을 불살라 더 이상 타오를 수 없게 되었을 때에, 즉 모든 것이 소진되었을 때에 가서야 꺼지기도 하지만 예상치 못한 강한 비바람을 마주하거나 취침 시간이 지체되어 조교나 교사들의 지휘 아래 강제로 급하게 꺼지기도 한다. 즉 아직 땔감이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어떤 위력에 의해 소진되거나 예상할 수 없는 변수에 의해 중단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번아웃에 빠지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열성을 쏟아붓던 일이 재미가 없어지거나 모든 것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나의 한도를 초과한 에너지를 발휘한 탓에 지쳤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다른 한편으론 해당 행위에서 더 이상 어떠한 의미도 찾을 수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게 다 무슨 의미가 있냐"는 자조 섞인 말을 내뱉으며 스스로를 무기력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 것일까. 그것은아마도 옅어진 시간의 농도 탓은 아닐까.
농도 = 용질의 질량/용액의 질량
문득 삶이 점점 싱거워지는 이유가 농도의 공식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든다. 소금물(삶)의 농도를 진하게 하려면 용질(소금=기쁨)의 양을 늘려야 한다. 반대로 소금물(삶)의 농도가 연해지게 하려면 용액(살아온 시간)의 양을 늘리면 된다. 즉 살면 살수록 용액의 양(살아온 시간)은 자연스레 늘어나기 때문에 삶의 농도는 가만히 있다 보면 자연스레 묽어지게 마련이다. 세월의 흐름 위에 삶을 지탱하고 있으면서 살아온 시간의 양을 줄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삶의 농도를 진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용질(기쁜 시간)의 양을 늘릴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에는 시간의 농도를 고민하지 않는다. 즐거우면 즐거운대로 지루하면 지루한대로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면 그만이었다. 작은 물컵에 소금 한 스푼만 집어넣어도 곧바로 짭조름해지는 것처럼 살아온 시간의 절대량이 적은 탓에 농도의 연해짐을 고민하기엔 모든 자극이 너무도 자극적으로 다가오는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나이를 먹을수록 의무와 할 일은 늘어만 간다. 직업의 세계와 가정의 세계에 시간을 쏟아붓고 나면 나의 세계를 위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필연적으로 충만함을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제공받는 자극의 횟수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시간의 저주로 인해 자극 자체에 무뎌지기까지 한다. 이는 삶의 농도를 연해지게 만드는데 가속도를 붙인다.
그래도 재미있게 살아보겠다고 압착된 시간의 틈을 어렵사리 벌려 나의 기쁨을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해본다. 친구들과의 술자리, 취미생활, 여행, 운동, 하지만 이런 것들을 해봐도 마뜩잖은 기분이 들 때가 많다.
그 이유는 바로 기쁨의 농도가 진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도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서로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게 되었다. 서로를 응원하며 보듬고 살펴주는 것 없이 그저 늘 같은 쳇바퀴 도는 이야기만 나누는 시간의 농도는 결코 진한 풍미를 풍길 수 없다.
오래된 친구들과의 만남이 어느 순간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일 년에 한 번조차 만나기 어려운 친구들이라면 그저 만나서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고 그 자체가 곧 의미 있는 행위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잦은 만남을 가지면서도 단지 허공을 맴도는 이야기만을 서로에게 던질 뿐인 만남이라면 어느 순간 그 시간에 대한 회의감이 찾아오게 된다.
여행도 운동도 취미생활도 모두 마찬가지다. 자발적 갈증에 따라 이루어지지 않는 모든 행위들은 묽디 묽은 농도의 시간으로 환원될 뿐이다. 하지만 자발적 갈증이 발생할 때까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내팽개쳐 두었다가는 진정 갈급한 상황에서 목을 축일 수 없게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 또 답이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야 만다. 그래서 괴롭다. 답을 찾자니 답이 없는 것 같고 답을 찾는 것을 그만두자니 불안하여 다음 단계를 밟아갈 수가 없다. 그저 충만한 기쁨 속에서 살고 싶을 뿐인데 그것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제는 무엇을 하며 시간을 채워가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