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든함을 뽐내는 4살 어린이
아빠: 이렇게 하는 거 맞아?
아들: 아니 그게 아니고 팔을 뒤로 먼저 돌려야 돼
아빠: 이렇게?
아들: 아니 꼬리를 먼저 빼야 변신을 할 수 있어. 할 수 있겠어?
요즘 공룡 변신 로봇에 심취한 아들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신 로봇을 가지고 공룡으로 변신했다 로봇으로 변신하기를 반복한다. 쉬운 장난감은 금세 변신 방법을 터득해 제법 능숙하게 공룡과 로봇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변신 푸왁, 변신 푸왁"을 연신 외쳐대느라 먹던 밥풀을 온 집안에 뿜어대기 일쑤다.
그렇게 변신로봇을 가지고 놀다가 변신 과정이 조금 복잡해 혼자 힘으로 변신시키기 어려운 장난감은 아빠에게 도움을 요청하곤 한다. 아빠가 로봇을 변신시키는 과정을 옆에서 유심히 지켜봤는지 아직 손이 여물지 않아 스스로 조작하기는 힘들어도 머리로는 변신의 과정을 꽤 자세히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장난감을 변신시키면서도 아이와 한마디 이야기라도 더 나누고 싶어 무심결에 던진 질문에 아이는 예상치 못한 역질문을 던짐으로써 아빠를 당황시킨다.
할 수 있겠어?
아이에게 무언가를 설명하거나 시범을 보인 뒤 내가 자주 던졌던 질문이다. 본인이 이 과업을 해낼 수 있을지 없을지 스스로 판단하게 하기 위한 질문이었으면서 그와 동시에 해냈다면 칭찬을, 해내기 어려운 과업이라는 판단을 혼자서 내렸다면 응원과 격려를 해주기 위함이었다.
아이는 모방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방법을 익혀나간다. 아마 4살 아이가 하는 대부분의 말들은 부모 혹은 어린이집에서 보거나 들었던 말일 확률이 높다. 아! 거기에 하나 더 포함시키자면 유튜브를 포함할 수도 있겠다. 저런 말을 어디에서 배웠지 싶다가 함께 유튜브를 보면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 유튜브 동영상에서 그대로 재생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아직까지는 불온한 표현이 아닌 긍정적 표현들만 따라 하고 있어서 다행이지만 영상 매체의 영향력에 정말이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던 순간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이 아이의 입을 통해 나의 귀로 전달되었을 때 놀라움과 함께 밀려든 마음은 든든함이었다. 4살짜리 아이에게 든든함을 느끼는 못난 부모가 어디에 있겠느냐만, 그 순간 아이와 나의 시간은 20년 30년을 빠르게 휘감아 돌며 먼 미래의 어느 곳으로 이동했다. 30년 뒤 어느 시간의 계단 즈음에 걸터앉아 아기에서 청년이 된 아들이, 청년에서 노인이 된 아비에게 건네는 든든한 염려의 말. 찰나의 순간 동안 미래의 어느 시점과 만나고 온 듯한 기분이 들어 잠시지만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에 다녀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살다 살다 4살짜리 아기에게 할 수 있겠냐는 말을 들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 했다. 아이를 키우는 일은 이렇게 늘 상상해본 적 없는 순간들의 연속이다. 상상해본 적 없는 그러한 순간들은 때로는 당혹과 불안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순간은 이토록 빛나는 환희와 함께일 때가 많다.
별 것 아닌 말이 이토록 거대하게 다가왔던 이유는 단순히 모든 말들이 아이의 입에서 처음으로 나왔기 때문일까? 모든 순간이 처음이기 때문에 빛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보다 더 귀하고 소중한 이유는 아마 아이의 언어에 녹아있는 "순수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 숨어 있는 뜻이 전혀 없고, 이면의 감정이나 배경을 헤아릴 필요도 없는, 어떠한 의도도 품지 않은 채로, 단어 날 것 그대로의 의미만을 생각하면 되는 솔직한 의사표현. 아이와의 대화는 그래서 그 자체로 치유의 효과가 있다. 가장 순수한 태고의 그것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할 수 있을 때까지는 뭐든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부모가 되어갈 수 있게 아이는 오늘도 부모를 가르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