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중요한 이유
아들: 엄마 가려워 긁어줘
엄마: 응 알았어 (등을 긁어준다)
아들: 엄마 거기 말고 여기 긁어주라니까
엄마: 알았어 긁어줄게(팔을 긁어준다)
아들: 아니야 등 긁어주세요.
엄마: 긁고 있는데 자꾸 긁어달라고 하면 엄마가 어디를 긁어야 되지?
아들: 등, 엄마 등 긁어 줄 수 있어?
아토피가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더워서 그런 것인지 새벽마다 긁어달라며 깨는 탓에 가족 모두 통잠을 이루기 어렵다. 아이의 칭얼거림을 인지하는 순간 새벽의 단잠에서 깨어나 불쾌지수가 확 높아졌다가도 아무렴 가려워하는 당사자만큼 힘들까 싶은 마음에 여기저기 긁어달라는 곳을 긁어준다. 그런데 그날은 긁어달라는 아이의 말이 자꾸 바뀌어가는 것이 웃기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여 그날 새벽의 일을 가만히 곱씹어본다.
부부란 등을 긁어주는 사이라고 누가 말했던가. 그만큼 가까우면서도 내 힘으로 하기 어려운 일을 거들어주는 존재라는 뜻일 테다. 등을 긁어달라는 아이의 말에는 가까운 존재에 대한 믿음이 있다. 가려우니 시원해지고 싶다는 욕망, 그리고 그 가려운 곳이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이기 때문에 피치 못하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상황. 이런 조건 속에서 아이는 엄마에게 등을 긁어달라고 요청할 수밖에 없었을 테다.
하지만 엄마의 긁음이 시원치 않았던 모양인지 "긁어줘"라는 짧은 요청은 금세 "긁어주라니까"라는 짜증 섞인 요구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자 아이는 "긁어주세요"라며 도움을 요청하는 자세로 바뀌었고 종국에 가서는 "긁어줄 수 있어?"라는 형태로 그 절실함을 나타냈다.
졸리고 가렵고, 자고는 싶은데 덥고, 무척이나 짜증이 났을 테다. 단순한 요구였던 "긁어줘"라는 발화는 점차 그 형태를 변화하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에게 도달했고 아이는 결국 시원함을 느끼며 금세 소곤소곤 잠이 들었다.
"긁어줘"라는 당당한 요구에서 "긁어줄 수 있어?"로의 문장의 변화가 마냥 긍정적인 것은 아니다. 게다가 도움을 요청할 때 꼭 그런 식의 화법을 이용해야 한다는 말을 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이러한 변화를 바라보는 시각은 둘로 나뉠 수 있을 테다. 자세를 낮추어 가면서도 본인이 원하는 바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이 중요하다는 실사구시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사람이라면 긍정의 박수를 보낼 것이며, 아동기 욕구 충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면 어린아이가 그렇게 저자세의 발화를 사용할 때까지 빨리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못했냐며 부정의 철퇴를 내리칠 것이다.
양쪽의 생각에 모두 공감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 다양한 표현 방식으로 자신의 원하는 바를 표현해냈다는 점이다. "긁어줘"에서 "긁어줄 수 있어?"로 문장의 방식이 바뀌어서 그렇게 보일 뿐이지 반대로 "긁어줄 수 있어?"에서 "긁어줘"로 문장의 형태를 바꾸어갔어도 아이의 입장에서는 사실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을 테다. 아이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원하는 바를 얻기 위해 자세를 낮추었다는 식의, 어떤 의도를 가지고 발화의 변화를 구성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변화의 방향성보다는 변화의 다양성에 더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겠다.
다양한 형태로 접근하려는 노력을 가상히 여긴다. 주저하다가 손 한번 뻗어보지 못하고 시작도 못해본 채 그만두거나 한두 번의 얕은 도전 끝에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뒤 우리에게 남는 것은 후회밖엔 없다. 목표에 달성을 하건 못하건 그건 중요치 않다. 원하는 바를 손에 넣기 위해 다양한 형태로 접근할 수 있는 유연함과 행동력은 한 사람의 인생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다. 끝까지 뻗어봐야만 자신의 기량을 확인할 수 있는 법이니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늘 자신을 내던져봐야 한다. 긁어줘, 긁어달라니까, 긁어주세요, 긁어줄 수 있어?라는 다양한 도전 끝에 원하는 시원함을 얻어갈 수 있었듯이 인생을 살며 갑갑함과 가려움을 느끼는 순간마다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등을 긁어낼 수 있는 삶을 살아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