떼쓰던 아기에서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가로
아들: 아빠 끈끈이주걱을 만들고 싶은데 기역이 하나 모자라요.
아빠: 그래? 기역이 일곱 개 밖에 없나 봐. 그래서 마지막 걱의 받침을 넣을 수가 없네. 키읔 받침을 넣어도 소리는 똑같이 걱이라고 나니까 우리 기역 대신 키읔을 넣자.
아들: 아니야 기역을 넣고 싶어. 기역 찾아줘.
아빠: 이 보드게임엔 기역이 일곱 개라서 못 만드는 단어가 있을 수도 있어.
아들: (눈을 반짝거리며) 아빠 그럼 우리 기역이 하나 더 필요하니까 라온을 하나 더 사자.
라온이라는 보드게임이 있다. 복잡한 규칙이 있지만 간단히 말하자면 정사각형 모양의 플라스틱이 있고 그 안에 자음과 모음이 개별적으로 하나씩 적혀 있어 그것들을 조합해 글자를 만드는 게임이다. 우리는 본래의 규칙을 무시하고 아이의 한글 공부를 위해 놀이로 가장해 접근했다.
"아들이 좋아하는 자동차를 한번 만들어볼까?", "아들이 좋아하는 파리지옥을 한번 만들어볼까?" 이런 식이다. 그런데 그렇게 놀다가 요즘은 초미의 관심사인 식충식물 이름을 반복해서 만들고 있는데 식충식물 중 하나인 끈끈이주걱을 만들다가 일이 터지고 말았다.
"끈끈이주걱"이라는 글자를 만들려면 기역이 무려 8개나 필요했다. 하지만 보드게임에 기역은 7개가 전부였다. 그래서 마지막 받침에 들어갈 기역이 하나 모자랐다. 그래서 급한 대로 원래는 기역을 집어넣어야 하지만 키읔을 집어넣어도 소리가 같으니 키읔을 집어넣자고 우겨봤다. 하지만 기어코 기역을 집어넣고 싶다며 아이는 며칠째 반복해서 "끈끈이지오" 라는 글자를 만들어놓고 나와 자꾸 부딪히던 중이었다.
그렇게 떼쓰기를 며칠 하더니 어느 날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지 "그럼 하나 더 사자!"라며 초롱초롱 눈을 빛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울며 때를 쓰기만 하던 어린아이가 본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문제 해결을 위한 협상가로 탈바꿈하는 순간이었다.
뭐라고~?
처음에는 이 녀석이 뭐든 돈으로 해결하려는 버릇이 들면 어쩌나 싶은 노파심에 걱정이 먼저 되었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른 문제 상황에 있어서는 그런 식의 제안을 하지 않았던 것이 떠올랐다. 예를 들면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부서졌을 때 강력한 풀로 붙여달라고 요구한다거나 대형마트에 가서 구경을 하다가 갖고 싶은 게 있어도 설득을 하면 수긍을 했던 일들, 그런 기억들을 가만히 떠올려보니 무조건 사달라고 하는 것은 또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노파심은 사라지고 웃음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나름의 방법 제시였는지, 그저 좋아하는 장난감을 하나 더 갖고 싶었던 것이었는지 그 속 마음은 모르겠지만 꽤 유쾌하고 기발한 응답이었던 것으로 기억에 남을 것 같다. 무작정 울고불고 때를 쓰는 것보다야 훨씬 합리적이고 받아들여질 만한 제안이 아닌가. 떼법과 악성 민원이 난무하는 세상에 합리적인 거래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드물다. 목소리만 높인다고 해서 문제를 해결해 낼 수 없다. 떼쓰지 않고 제안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좋은 제안이었어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