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기호를 파악하는 일
엄마 : 아들은 무슨 과일을 좋아해?
아들: 포도
엄마 : 그래 그럼 엄마가 내일 포도 사다 줄게~
아들: 초록색 포도 사다 줘, 샤인 머스켓, 그게 제일 좋아
엄마: 응 내일 엄마가 샤인 머스켓 사다 줄게
아들: 응 그런데 보라색 포도도 사다 줘. 할아버지는 보라색 포도 좋아해. 할아버지랑 같이 먹게 보라색 포도도 사다 줘
아니 얘가 왜 이러지. 그렇게 지기 싫어하고 주기 싫어하던 녀석이 요즘 예쁜 말을 많이 한다. 자신이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포도를 떠올리며 함께 사 오라는 말에 감동하지 않을 어른이 어디 있으랴. 아빠가 좋아하는 초록색, 엄마가 좋아하는 커피,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포도, 요즘 부쩍 타인의 기호를 파악하여 기회가 될 때 그것을 제공하려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
우리는 왜 타인의 기호를 파악하려 하는가. 그것의 본질적 이유는 아마도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리라. 저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기호와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해내는 일은 인간이 다른 인간과 교류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필요한 기초 작업에 해당된다.
다른 사람이 궁금하다는 것은 그 사람과 친밀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친밀해지고 싶은 이유야 다양할 테지만 친밀해지고 싶다는 그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에게 다가간다. 다가서려는 행동을 취하려 할 때 가장 기본적인 접근법은 그 사람의 기호를 파악하는 일이다. 아이는 그렇게 타인의 기호를 파악하며 자연스레 관계 맺음의 기초적인 방법을 터득해간다.
타인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일은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사랑을 주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전해주고 싶다는 그 순수한 마음.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전해주었을 때 기뻐하며 미소 짓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상태. 아이는 어렴풋이 그런 기쁨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누구의 기호를 파악하려 하는가
우리는 살며 어떤 사람들의 기호를 파악하려 애쓰는가. 그것이 주로 상사나 선배, 거래처 사장님처럼 내 욕망을 실현시키거나 좌절시킬 수 있는 위력자 들일 때가 많은가, 그렇지 않다면 가족이나 친구, 혹은 직업과 관련 없는 단체에서 마주한 어떤 이들처럼 나에게 어떠한 위력도 가하지 않을 것이라 예상되거나 갑을관계가 형성되지 않은 사람들일 때가 많은가.
완벽히 전자와 후자를 나누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기호를 파악하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불행할 확률이 높다. 그들은 나를 사랑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 역시 그들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사랑을 주고받기 위한 기호의 파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의 기호를 더 많이, 자주 파악하려 애쓰는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적어도 사랑에 있어서 만큼은 더 커다란 복주머니를 주고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있다고 봐야 옳다.
할아버지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아이의 모습은 아름답다. 직장 상사의 기호를 파악하려는 직장인의 모습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은 각각 사랑과 굴종을 바탕으로 움직이는 마음이기에 그러하다. 움직임의 바탕이 늘 사랑인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인생을 덜 외롭게 만들고 조금이라도 행복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에 그렇다. 사랑은 늘 옳다. 주기만 하더라도 그렇다. 오늘도 아이와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