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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 때 내가 삼오라고 읽었는데 이제는 삼십오라고 읽어

메타인지

by 정 호
아들: 아빠 이건 어떻게 읽어?

아빠: 이백삼십오라고 읽어

아들: 아기 때는 내가 숫자가 이렇게 있으면 삼오라고 읽었는데 이제는 내가 커서 삼십오라고 읽어


숫자가 적혀있는 보드게임 칩을 섞어가며 세 자릿수 읽는 연습을 하던 어느 날이었다. 아이는 자신이 아기였을 때에는(어느 시점까지를 자신이 아기였다고 규정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두 자리 숫자를 보고도 한자리 숫자처럼 나눠 읽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아기가 아닌 존재가 되어서(아마 오빠..? 혹은 형이라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일까?) 두 자리 숫자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고 자랑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한자리 수를 읽던 아이가 두 자릿수를 읽고, 세 자릿수까지 읽게 된 것은 분명 성장이 진행된 것이기에 칭찬과 격려를 아낄 이유가 없다. 다만 그보다 더 기쁘고 기특했던 것은 전에는 읽지 못했던 것을 읽어냈다는 객관적 사실보다 자신이 이전에는 할 수 없었던 것을 지금은 할 줄 알게 되었다는 사실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인지에 대한 인지, 그것을 메타인지라 부른다.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내가 아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은 무엇인지, 내 인지 과정과 사고 체계를 보다 상위의 차원에서 조망하며 알아차리는 능력. 이는 단순히 공부를 잘하기 위해 필요한 학습의 보조 수단으로써의 능력이라기보다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 필요한 생의 동반자적 능력치라고 보아야 더 적절할 테다.


인지 능력이라는 인간의 기능을 지금 벌어지는 어떤 것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메타인지는 그 이해에 대해 보다 고차원적이며 심층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상위 수준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메타인지의 기본은 자기 객관화다. 유아적 자기 중심성에서 벗어나 타인을 바라보듯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줄 아는 사람만이 제대로 된 메타 인지력을 획득할 수 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고, 해낼 수 없는 것은 무엇인지 빨리 알아채는 일은 중요하다. 그것은 시간의 낭비를 막아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좋아하는 일, 잘하는 일을 발견하게 도와 진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메타인지는 삶을 잘 살아내기 위해 반드시 도달해야 할 영역이다.


메타인지가 부족한 사람들을 한번 생각해보자. 그들은 오류가 생긴 자판기처럼 버튼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다른 음료를 자꾸만 내뱉는다.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과소평가 하기 일쑤인 그들은, 자신이 해낼 수 없는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거나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걱정에 휩싸여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곤 한다. 이는 인생 전반에 걸쳐 해낼 수 없는 것들에 도전하느라 해낼 수 있는 것들을 흘려보내게 만드는 최악의 선택과 결정들을 반복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한 인간에게 후회라는 감정을 남긴다.


할 수 있다는 외침은 그간 살아온 삶의 데이터를 바탕으로 뿌려야 할 보조 영양제와 같다. 한 인간의 삶의 궤적을 파악하고 그 궤적의 테두리 어디쯤에 위치한 최선의 결과를 내기 위해 보조적인 응원의 구호로 사용될 때 그 효과는 극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런 근간이 없는, 자료가 없는, 자기 객관화가 없는 상태에서 외치는 "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공허하고 위험하다. 한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늪으로 가라앉히기에 딱 좋은 말이기 때문이다. 칭찬이 독이 될지 득이 될지,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자신을 잘 알고 있느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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