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실베이니아 주립대학에서 노동고용관계학을 전공했고 서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조직 내 커뮤니케이션과 정신 건강에 대해 연구하며 인사조직 석사 과정을 밟았다는 저자의 약력은 이 책의 저자가 언어와 인간관계의 세계에 진지하게 임할 수밖에 없는 사람임을 설명하는 듯하다.
훈련소에서 어느 날 동기들과 '잘 못 들었습니다?'에 대해 성토했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 누군가 '다시 한번 말씀해주십시오' 등 다른 문장도 있는데 왜 꼭 '잘 못 들었습니다'라고 해야 하냐는 질문을 던졌고, 한 친구가 아주 의미심장한 의견을 제시했다.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십시오'와 같은 문장은 어떤 말을 잘 알아듣지 못한 것의 원인을 화자에게서 찾는 반면 '잘 못 들었습니다'는 화자는 똑바로 말했는데 청자, 즉 나의 부족함으로 인해 잘 알아듣지 못했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 11p 프롤로그 중
'참 눈치 없는 언어들'은 바로 이 지점에서 첫 발을 내딛기 시작한 책이다. 무례한 사람들은 얼마나 쉽게 자신의 무례함을 쿨함으로 가장하고 그것이 무례하다고 말하는 이들에게 예민함이라는 틀을 씌우는가. 수신자의 과잉방어 또는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언어의 비뚤어진 해석도 아주 존재하지 않는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테지만, 분명 듣기 싫고 기분을 나쁘게 만드는 말들은 대부분의 경우 그것이 수신자의 잘못이 아니라 명백히 발신자의 잘못이라는 것을 저자는 힘주어 말하고 있다. 그렇게 하나 둘 모아 온 눈치 없는 언어들에 대한 이야기를 작가는 때로는 담담하게 때로는 열을 내며 그렇게 느끼는 이유에 대해 차근히 풀어낸다. 작가가 생각하는 바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많은 공감이 된다. 나 역시 어렴풋하게 기분 나쁘게 느껴왔던 말의 원인에 대해서 저자의 해석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기 충분했기 때문이다.
책은 총 5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 생각할수록 참 눈치 없는 말. 2장 알고 보면 눈치 없는 말. 3장 힘 빠지게 만드는 참 눈치 없는 말은 굳이 장을 나누어 놓기는 했지만 챕터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어디인지 뚜렷하게 인식하기 어렵다. 나도 그랬다, 괜찮겠어? 여유를 가져, 비싸다, 그릇이 크다, 그냥, 나 결혼해, 각자 입장 차이가 있지 와 같이 해석이 모호하거나 하나마나 한 말 그리고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무례한 언어들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4장과 5장은 앞선 1,2,3장과 분명히 결을 달리한다. 4장 눈치 없이 유행만 따르는 말에서는 꼰때냐, 오글거리다, 손절해, 세줄 요약좀 처럼 시대적 흐름을 타고 유행하는 언어들 중 우리의 사고에 악영향을 끼치는 언어들을 추려 소개하고 있다. 5장 눈치 없이 가치를 몰랐던 말에서는 자신의 눈치 없었음을 인식하고 참회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농장을 사다, tv속으로 들어가처럼 해당 문장만 봐서는 이게 왜 눈치 없는 문장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들을 가져와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그 문장 안에 담겨있는 애틋함과 그리움, 숨은 의미 등을 퍼올린다.
청자를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인 말
"고집이 세다."
누군가가 고집이 세다고 느껴지는 경우는 다음 셋 중 하나일 확률이 매우 높다. 1) 나의 설득력이 부족한 경우 2) 상대방의 이해력이 부족한데 그것을 이해하고 이해를 돕기 위해 노력할 의지가 없는, 즉 내가 불친절한 경우 3) 상대방과 악감정이 있거나 내가 너무 권위적이어서 상대방이 내 말에 귀 기울이고 싶지 않은데 그것을 눈치 채지 못하는 경우. -30p
무릎을 칠만큼 기가 막힌 통찰이다. 우리가 타인의 생각을 바꾸지 못하는 이유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저자의 시야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고집이 세다는 말을 할 때는 저 위의 셋 중 하나일 확률이 매우 높다. 즉 고집이 세다는 말이 입에서 맴돌 때에는 상대가 아닌 나를 바라봐야 한다. 내 설명이 부족했는지, 이해를 돕기 위해 더 친절해질 수 있는지, 내가 너무 권위적인 것은 아닌지. 듣는 사람의 고집을 판단하는 일은 그다음으로 미뤄도 늦지 않다.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어 보이는 말
"여유를 가져. 힘 빼."
저자의 생각에 의하면 여유를 가지라거나 힘을 빼라는 소리는 하나마나한 말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마음 상태이기 때문이다. 여유나 힘을 빼는 것은 노력을 통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며 원하는 것을 성취해 낸 뒤 어느 정도 고수의 반열에 오른 뒤에라야 자연스레 따라오는 감정 혹은 상태라는 해석은 일리가 있다.
우리가 여유를 갖지 못하는 이유는 여유가 없기 때문이며 힘을 빼지 못하는 이유는 초보이기 때문이다. 여유가 없는데 여유를 가질 수 없고 초보인데 힘을 빼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다. 결국 여유를 갖고 힘을 빼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어떤 허들을 넘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맥락에 따라 해석의 범위가 너무 넓은 말
"좋다. 싫다. 안다. 모른다. 그냥."
좋다. 싫다. 안다. 모른다. 그냥. 이런 말들은 그 자체로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이지만 맥락에 따라 너무도 다양하게 사용되기 때문에 그 넓은 폭의 스팩트럼만큼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대체 왜 좋은지, 어째서 싫은지, 무엇을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그냥이라는 말이 품고 있는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자신의 욕망을 숨긴 채
상대방을 위하는 것으로 가장한 말들
"괜찮겠어? 기회를 줄게"
우리는 선택하기 싫거나 애매할 때 타인에게 선택의 기회를 넘긴다. 그것은 비난받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다. 괜찮겠어? 같은 말이 대표적으로 선택을 떠넘기는 부드러움을 가장한 폭력의 언어다. 저자의 경험처럼 피곤한 날이지만 데이트를 위해 연인에게 언제 어디서 만나자고 연락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의 입에서 괜찮겠어?라는 말이 나오는 순간 예민한 사람은 바로 알아차리게 된다. 그 역시 만남을 적극적으로 원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피곤해 보이는 나를 위해서라면 차라리 오늘은 피곤해 보이니 집에서 쉬자고 했어야 더 적당했을 테다. 괜찮겠냐는 말은 그래서 때때로 비겁해 보인다. 자신을 숨기고 있다는 느낌이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기회를 준다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그 기회가 온전히 나만을 위한,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해서 제공되는 것이라면 기쁠 일이지만 세상에 그런 기회는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제공자의 이득을 바탕에 둔 기회 제공일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기회를 준다는 말 역시 솔직하지 않은 말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자신의 좁은 견문을 드러내는 말
"특이하다"
특이하다는 말을 내뱉는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식견을 드러내는 것에 불과하다는 작가의 생각에 분명 동의한다. 그것은 자신의 세계 안에서, 자신을 기준으로 내뱉는 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말들이 그렇지 않은가. 모든 말의 기준은 자신이다. 특이하다는 말이 자신의 견문을 기준으로 특이성을 뽑아내는 것이라곤 하지만 앞서 말한 대부분의 말들 모두 화자의 견문이나 상태에 기대어 발화된다.
그렇게 생각하니 할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다. 배울수록 벼는 고개를 숙인다고 했던가. 알면 알수록 말이라는 것은 주관의 화신 같은 것이라 내뱉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각자에 의해 발화되고 해석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니 말을 아끼는 것 말고 신중해지는 다른 방법은 찾기 어려워진다.
"그릇이 크다"는 말의 새로운 해석.
우리는 보통 그릇이 큰 사람이 되어야 하며 응당 그릇이 큰 것을 선하고 좋은 것, 어떤 추구해야 할 절대적인 옳음과 같이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하지만 저자는 조금 달리 바라보고 있다. 무조건 그릇이 커야 좋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릇의 크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릇 안이 얼마나 채워져 있고 무엇으로 채워져 있느냐는 것이다. 모든 것은 양면성이 존재하듯 그릇이 크기만 하고 그 속이 비어 있으면 요란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을 저자는 지적한다. 게다가 어차피 그릇은 각자의 쓰임새가 있기 때문에 굳이 그릇을 늘릴 필요조차 없다고 이야기한다.
당연한 것 같지만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생각이다. 나는 왜 그저 그릇이 커야 한다는 말을 무조건 옳은 소리인 것으로만 생각해왔을까. 새로운 생각과 마주하는 것은 이토록 즐겁다.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완전히 생경한 음식을 맛보았을 때의 즐거움,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로운 장르의 영화를 감상했을 때의 즐거움과 비슷하다.
더군다나 그릇이 큰 사람은 그릇이 커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점,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설령 그릇이 크다고 할지라도 그 안에 배려심이라는 것을 채우지 못한 사람이라는 작가의 생각 또한 재미있다. 이렇게 말에 대해 말하는 사람의 글을 읽고 있으니 어떤 말이든 선뜻 내뱉기가 앞으로 더욱 어려워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노력을 들이지 않고
쉽게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말
"꼰때냐, 손절해, 세줄 요약 좀"
꼰때냐? 손절해~ 세줄 요약 좀! 이런 유행어들이 불편한 이유는 그것들에서 노력을 들이지 않고 쉽게 무언가를 얻어가려는 태도가 공통적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말들의 근본 배경에는 극단적인 자기중심적 태도가 스며있기 때문이다.
꼰때가 되는 것은 피해야 할 일이지만 자신의 기준에 맞지 않는 모든 행위를 꼰대들이 하는 행위로 간주하는 것 또한 꼰때스러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즘 들어 무슨 말을 하기 어렵다는 소리가 나이를 불문하고 터져 나온다. 조금만 자신의 입맛에 맞지 않는 소리를 들었을 때 "꼰때같다"는 말이 마치 무적의 방패처럼 튀어나오는 모습을 몇 번만 관측하게 되면 우리는 입에 재갈을 물게 된다. 누구나 꼰때가 되기는 싫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유행이 분명하다. 옳고 그름을 가리려는 노력, 지켜야 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눈먼 자들의 대화법에 가깝기 때문이다. 손절하라는 말이나 세줄 요약을 해달라는 말은 그보다 더하다. 관계에 있어 손절이 웬 말이며 조금만 긴 텍스트가 보이면 읽기가 귀찮으니 세줄로 요약해달라는 요청은 극단적 이기주의의 폭발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런데 그 대리님 진짜 이제훈하고 똑같이 생기시지 않았어요? 정말 잘생겼어요"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에게 돌아온 말은 참 신선했다. "누군가를 칭찬할 때 '닮았다'라는 표현을 쓰는 건 좋은 게 아니야. 그건 그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훼손하는 거야. 그 사람 고유의 장점을 말해야지, 누군가와 '닮았다'라고 말하면 안 되지." 나는 나의 어떤 점이 누군가와 닮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나의 아이덴티티를 훼손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때로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 같다." - 89p
참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본인이 불편하게 느꼈던 말들에 대해서 책을 한 권 썼으면서도 본인의 말이 타인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경험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 그렇다면 결국 반대의 경우도 상상이 가능하다. 본인을 불편하게 만들었던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얼마든지 상대방은 반대의 논리를 펼칠 수 있다는 것.
결국 인생에 정답이 없다는 말은 언어 사용에 있어서도 일맥상통한다. 맞는 말이냐 틀린 말이냐는 중요치 않다. 맞는 말로 만들 수 있느냐는 것이 중요하다. 맞는 말로 만들기 위해서는 그럴싸한 논리와 감정적 호소가 필요하다. 결국 얼마나 논리적인 이유를 만들어 내느냐, 사람들의 마음에 공감대를 만들어낼 수 있느냐를 가지고 모든 언어는 정당성을 구축하게 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해서 "사람을 죽여도 된다"는 말조차 어떤 경우에는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셈이다.
사실 말이라는 것은 텍스트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하지만 그 말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맥락 안에서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그래서 저자가 느꼈던 불편한 말들이 다른 때에는 전혀 불편하지 않은 말로 다가오기도 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말들이 꼭 불편함을 자아내는 말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자신이 느낀 바를 책으로 펴낸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충분히 공감되는 부분이 있었고 책이나 글은 누군가에게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대리인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수많은 개인의 생각들이 책으로 세상에 나올 때 수많은 또 다른 개인들은 자신에게 딱 맞는 옷을 입은 것 같은 만족감을, 혹은 자신의 마음을 완벽하게 대변해주는 변호사를 만난 것 같은 든든함을 느끼게 될 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