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는 것처럼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짜라자라짜자잔~ 짜라자라짜자잔~
(라디오에서 트로트 후렴이 반복적으로 흘러나온다)
딸: 어휴 그놈에 뽕짝 시끄러워 죽겠네. 좀 끄면 안 돼?
아빠: 왜 좋기만 하구만 너도 나이 들어봐라 뽕짝이 좋아진다.
딸: 나는 절대로 트로트 안 들어. 우리 BTS오빠들 노래만 들을 거야
아빠: BTS는 영원할 줄 알어? 그게 너네 시대의 뽕짝이고, 아빠 시대의 BTS가 나훈아, 남진이야
어떤 이는 나훈아를 좋아하고 누군가는 방탄소년단을 좋아한다. 그렇다면 음악을 단순히 취향이라고 정의 내릴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음악은 개인적 취향이기 이전에 한 시대의 문화이며, 내 삶의 반영이기 때문이다.
이게 뭔 노친네 같은 소리인가. 내가 무슨 음악을 좋아하건 그것은 내 마음인데 시대의 문화는 무엇이고 내 삶의 반영은 또 무슨 뜬구름 잡는 소리냔 말이다.
나훈아가 슈퍼스타였던 시절의 사람들은 나훈아 노래를 들으며 그 시절을 살아온 사람들끼리 통하는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렇게 한 예술가는 대중적 인지도를 높여가고 그것은 티켓파워라고 불리는 강력한 문화 권력을 생성한다. 한 예술가가 그렇게 높은 인지도와 인기, 문화권력을 획득하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에 가능한 것일까. 외모, 가창력, 매력, 삶의 서사 등 한 명의 연예인은 수많은 요소들이 결합해 어느 순간 예상치 못한 대스타로 발돋움하게 된다. 그것은 예상할 수 없는 사회 현상중 하나다. 인물이 수려하고 노래를 기가 막히게 잘 불러도 대중의 기억 속에 작은 실금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가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갓 데뷔한 아이돌들은 얼굴을 알리기 위해 각종 예능에 출현한다. 멤버들 가운데 특별히 끼가 있는 몇 멤버가 예능에 나와 인지도를 올렸기 때문일 수고 있고, 시대적 흐름에 발맞춘 노래 가사가 대중의 마음속 깊숙이 파고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한 개인의 삶이 너무도 비극적이어서 사후에 재발견되어 전설로 평가받는 가수도 있다. 이처럼 시대의 어느 한 자락을 움켜쥘 정도의 명곡들, 그리고 그렇게 우연히 탄생한 스타는 그래서 시대에 속해있는 문화현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시대정신을 초월해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고 노래와 같이 인간이 생산해내는 문화의 일부 역시 마찬가지인 탓이다.
그렇다면 노래가 내 삶을 반영한다는 것은 또 무슨 소리일까. 가만히 생각해보자. 우리는 언제 노래를 찾아듣는가. 그리고 어떤 노래들을 찾아 듣는가. 인간이 일평생 가장 노래를 많이 듣는 시기는 아마 스무 살이 되기 전 사춘기 시절이 아닐까. 조금 더 인심을 쓴다면 취업하기 이전 대학생 시절 정도까지 확장해줄 수 있겠다. 그야말로 청춘은 음악과 함께라는 소리다. 그렇다면 왜 유독 그 시절에 우리는 음악을 많이 찾아 듣는가. 그것은 바로 그 시절이 감정이 폭발하는 시절이며 가장 가까이에서 우리의 감정과 공명하는 수단이 바로 음악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환희, 이별의 고통, 청춘의 열망, 불안한 미래, 꿈에 대한 방황, 우정, 사랑, 가족, 불안, 절망, 희망, 고통, 포기, 위로, 도전, 열정, 폭발, 산화, 침잠... 모든 역동적인 감정의 에너지가 응축되고 폭발되는 시기에 우리는 음악과 공명하여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며 표현하고 치유한다.
그렇게 폭풍 같던 시절이 인생의 전반기를 휩쓸고 지나간 후, 삶의 잔해들을 정리해나가다 음악을 들을 작은 여유가 생기는 순간이면 우리는 고장 난 라디오처럼 이전에 들었던 음악을 반복적으로 찾아 듣고는 한다. 물론 가끔 다양성에 대한 갈증, 시선의 확장 등을 이유로 새로운 음악에 도전해보기도 하지만 아주 끈기가 있는 사람이거나 음악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젊은 시절 들었던 음악을 넘어서 새로운 영역으로 나의 음악적 상상력을 확장해나가기 어렵다.
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하나도 없네
굳이 노래방을 가지 않더라도 가끔 목이 터져라 노래를 하고 싶어지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차 안에서 음악을 틀고 크게 소리칠 만반의 준비를 해보지만 이내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십 대 시절 들어왔던 노래를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금세 깨닫게 된다. 도대체 왜.. 왜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여전히 수십 년 전 그 자리에 멈춰있는 것일까. 분명 다양한 노래를 들어왔고 수많은 음악 프로그램에 열광하며 감동을 받아온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후렴구 몇 소절 말고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이토록 없는 것일까.
내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나이를 먹을수록 내것은 늘어나는 것 아니었던가. 물질적 소유, 정신적 성숙, 불어나는 지식, 어지러울 만큼 늘어난 만남들, 내 것이 없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토록 가진 게 많고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삶의 영역이 확장되었는데 도대체 내 것이 없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냔 말이다.
그런 것들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내 것"이라는 말에서 혼란이 있을 수 있겠다. 정정한다. 그런 것들은 "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남의 사랑은 그것이 아무리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처럼 비극적이고 운명적이라고 할지라도 내 마음에 작은 점도 남길 수 없다. 지랄 맞고 추접스럽고 쪽팔려서 어디에 말도 못 할 사랑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한 사랑은 내 인생에 엄청난 상흔을 남긴다. 때때로 그것은 평생 동안 지워지거나 잊히지 않는 상처가 되어 남아 있기까지 하다. 그런 상황에서 듣는 노래가, 그런 상황에서 읽는 소설이 잊힐 리 만무하다. 모든 것이 나에게로 수렴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내 감정이 요동칠 정도의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게 되었거나, 사건이 일어나도 내 감정이 요동치지 않을 만큼 성숙, 혹은 무뎌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음악이 예전처럼 귀에 팍팍 꽂히지 않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고흐는 자신을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만들었던 압생트를 그렇게도 마셔댔나 보다. 예술을 위해서,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색감을 보기 위해서, 자신을 서서히 갉아먹는 줄 알면서도 압생트를 끊어낼 수 없었던 고흐의 예술을 향한 열망에 숙연해진다. 아버지는 매독으로 죽고 어머니에게까지 감염되어 누이마저 선천성 매독으로 잃고 마는 에곤 실레는 또 어떠한가, 그에게 성은 죽음과도 같은 이미지였다고 한다. 에곤 실레 개인에게는 지옥 같은 불행이었을 테지만 그 불안과 트라우마는 에곤 실레만의 예술을 꽃피울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된다.
예술을 한다는 것은 어쩌면 평생 사춘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안 속을 헤매야 하는 저주를 선택해야 한다는 말일지도 모른다. 감정의 폭풍 속에서만 어떤 결과물들을 빚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예술가들은 유독 비극이 범람하는 삶을 살다 가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예술가가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예술을 위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불안을 향해 스스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