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 갇혀 버렸네 나

상황 판단하기

by 정 호
아들: 아빠 빨리 주사위 던져

아빠: 알겠어. 3이 나왔다. 앞으로 세 칸 가야지. 하나 둘 셋

아들: 이번엔 내 차례야

아빠: 응 던져봐 그런데 어디로 갈 거야? 어디로 가야 아빠 땅에 걸리지 않을까?

아들: 어? 갇혀 버렸네 나

아빠: 그러게 앞, 뒤, 오른쪽, 왼쪽 모두 아빠 양탄자가 깔려있는데? 어디로 가야 그나마 아빠 땅에 안 걸릴 가능성이 있을까?

아들: 사면초가네

아빠: 응..? 그래 맞아 사면초가네! 갇혀 버렸다!


보드게임을 하다가 자신이 갇서 어느 방향으로 움직여도 상대방의 땅을 밟아 점수를 토해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해맑게 웃으며 자신이 갇혀버렸다고 외치는 사랑스러운 이 아이는 과연 이후에 어떤 변화를 보여줄까.


아이의 새로운 변화가 다시금 기대되는 이유는 이 지점에 도달하기까지 몇 차례의 진화 과정을 거쳐왔음을 내 두 눈으로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이가 처음부터 웃으며 자신의 처지를 순순히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울고불고 게임을 하지 않겠다고 나뒹굴었다. 게임의 규칙을 지키기는커녕 자신이 점수를 잃는다고 바로 지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점을 내어주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마음에 그저 뒤로 냅다 드러누워 울음시위를 감행하고 마는 것이다. 그럴 때면 그 쨍쨍한 울음소리에 귀도 아프고 반복되는 투정에 짜증이 치솟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놀기 위해서, 아이의 발달을 위해서,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규칙을 설명하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처럼 울어재끼더니 어느 순간 아이는 울음을 멈추고 자신이 원하는 숫자가 나올 때까지 주사위를 반복해서 던기 시작했다. 이 역시 규칙을 어긴 것은 동일하지만 막연하게 현실을 부정하며 자신의 감정만을 앞세우던 '드러누워 울어재낌'의 시기와는 달리 름대로 이기기 위한 전략을 수립한 것처럼 보여 일견 대견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엇보다 '소리'의 고통에서 해방되었다는 점이 내 마음을 조금 너그럽게 만들어주었다.


그러더 어느 날 아이는 웃으며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였고 규칙을 지키며 게임을 즐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입에서 "갇혀버렸네?"라는 말이 나옴과 동시에 하늘 위로 솟아오르는 그의 입꼬리와 눈꼬리를 바라보며 나는 속으로 "이제 됐다"라는 쾌재 터뜨렸다.


교육이라는 행위는 거의 대부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같다는 느낌으로 환원된다. 교육의 대상이 바뀔지 안 바뀔지 모르거니와 바뀐다고 하더라도 도대체 언제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지 도무지 기약이 없기 때문 그러하다. 그리고 긍정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는 손에 꼽을 만큼 극히 드물게 발생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어느 너그러운 교육자는 "내가 보지 못했다고 꽃이 피지 않은 것은 아니며 언젠가 꽃 피울 수만 있다면 그것을 목격하는 것은 꼭 내가 되지 않아도 좋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는 교육을 업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마음에 품고 새겨야 하겠으나 그것이 진짜로 발생할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을 갖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의 일이다. 그러한 이유로 피교육자의 아주 작은 변화 앞에서도 교육자는 무한한 가능성을 확인하고 밀도 높은 환희를 경험한다. 교사가 그러하고 부모가 그러하다.


현실 부정 > 외면과 요령의 기대 > 사실 직면과 문제 해결, 아이는 이런 과정을 거쳐 새로운 단계의 정서로 도약했다. 이는 성인이 문제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보이는 반응과 유사하다. 부정 > 요령 > 받아들임, 현명한 사람이라면 현실 부정과 요령 피우는 것 없이 곧바로 받아들임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대부분의 범인들에게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을 모자라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렇게 후회를 반복하고 미련을 떨쳐내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애쓰며 살아간다. 부족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하며 그때그때 그 순간들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며 살아갈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