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이과 감성, 문과 감성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적, 학술적으로 명확히 정의된 개념은 아니지만 단어를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인지 직감적으로 느껴질 만큼 이미 꽤나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다. 이과 감성이라 함은 팩트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사실성, 체계성, 논리성을 주요 원리로 삼는다. 이와 대조적으로 문과 감성은 느낌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주로 문학성, 상징성, 추상성 등을 주요 원리로 하여 작동한다. 그래서 소위 이과 감성은 차갑지만 실제적이고 문과 감성은 따듯하지만 허구적이라는 상징을 어느 정도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문이과 감성을 따듯함과 차가움으로 대조시키기는 어렵다. 문사철로 대표되는 인문학적 소양은 때로는 그 어느 수학 과학적 학문보다 정밀하고 차가운 이성적 사유가 필요하기도 하며,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할 수 없는 과학적 실험과 이론의 태동이 인간을 향한 따듯한 시선에서 시작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분명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말속에는 일정량의 온화함과 따스함이 스며들어 있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다.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가. 교육부에서 발행한 2015 개정 교육과정에서는 세상을 보는 안목과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을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정의한다. 세상에 인간을 제외한 채 계획되고 진행되는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것은 사실 어떤 업을 수행하건 기왕에 갖춰두면 좋은 능력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배움을 통해 자신을 성장시키고, 자신의 삶을 준비해 나가야 하는 학생이라는 존재와 마주하는 교사라는 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에게 인문학적 소양이 단순히 '갖춰두면 좋은' 그러니까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다는 식의 개념으로 남아서는 곤란하다. 갖춰두면 좋은 것을 넘어 반드시 '갖춰야만 하는' 일종의 필수 요소여야 한다는 데 조금 더 마음이 기운다.
인문학적 소양이라는 말을 세상을 보는 안목과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이라고 정의한다면 교사가 하는 일 자체가 인문학을 수행하는 일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하는 일이 무엇인가. 행정 업무와 민원 처리 등 교육 이외의 많은 일을 수행하고 있지만 교사의 본질적 존재 이유와 교사가 반드시 수행해야 할 제1의 역할은 학생 교육이다.
그렇다면 학생을 교육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일까. 단순히 교육과정에 제시된 국어, 영어, 수학, 사회, 과학, 음악, 미술, 체육, 도덕, 실과 같은 교과목의 지식을 전달해야 한다는 것일까? 혹은 폭력은 왜 미화될 수 없는지, 예의가 왜 필요한지, 성실한 것이 왜 중요한 삶의 가치가 되어야 하는지, 꿈꾸는 것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움직이게 만드는지와 같은,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삶의 가치관에 대해 이야기를 해줘야 한다는 것일까?
혹자는 말한다 학교란 감옥과 같아서 사회의 부품을 생산해내는 정치적 도구에 불과하다고, 학교의 기원이 정제된 근로자를 양성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에 여전히 학교란 구시대적 유물에 불과하며 서둘러 모든 것을 뜯어고쳐야 된다고. 이는 과거는 알되 현재를 알지 못하는 무지의 소산이자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게으름에서 비롯된 편협함이다.
학교는 단순히 교과 지식을 전달하고 학생들을 사회화시키는 기관이 아니다. 모든 학교가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운영되지 않고 더욱이 모든 교사가 동일한 가치관을 가지고 학생과 마주하지 않는다. 학력을 최우선으로 삼는 학교와 교사가 있고 학생의 즐거운 유년생활을 최대 과제로 꼽는 학교와 교사도 있다. 진로교육이 중점인 학교, 기초학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교사, 문화예술을 슬로건으로 내세우는 학교, 노작교육을 중시하는 교사 등 학교와 교사는 그 수만큼 다양한 생각을 품고 학생을 대하고 있다.
하지만 학교와 교사가 이토록 다양한 방식으로 학생을 교육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학교와 교사를 관통하는 단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교육의 대상이 미성년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학교와 교사란 대학 이하의 교육기관과 교사로 한정한다. 대학생은 이미 법적인 성인이므로 자신의 삶을 오롯이 스스로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다. 허나 미성년은 다르다. 아직 도움이 필요한 존재이므로 반드시 조력자가 곁에서 지켜주고 안내해주며 학생 스스로 다양성을 탐색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한다. 도움이 필요한 존재에게 조력해야 한다는 바로 이 지점 때문에 교사에게는 인문학적 소양이 반드시 필요해진다.
소위 문학, 역사, 철학, 예술 등에 대한 폭넓은 배경 지식을 습득한 사람을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것을 진심으로 느끼고 삶에 적용하는 사람을 두고 인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세상을 보는 안목과 인간을 이해하는 능력이라는 인문학적 소양과 감수성은 어떻게 습득할 수 있는가.
배우지 않아도 살아온 삶의 폭이 넓은 사람은 그 삶의 반경만큼 이해의 폭 역시 넓어질 수밖에 없다. 경험보다 큰 스승은 없다는 말처럼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것을 토대로 이해의 범위를 확장시키기 때문이다. 하여 온몸으로 부딪히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은 굳이 인문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이미 어느 정도 도인의 수준에 도달해 있는 것을 우리는 종종 목격하곤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일생동안 일정 수준을 넘어서는 경험을 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 평범한 교사들은 반드시 인문학 공부가 필요하다.
문학은 개인적 삶의 기록이요 역사란 인류의 삶의 기록이다. 철학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던지는 공통된 질문에 대해 답을 주려는 학문이며 예술이란 인간이 궁극적으로 느끼고 싶어 하는, 혹은 느끼며 살아가는 오감의 극을 자극하는 작업이다.
문학만큼 한 인간을 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도구는 없다. 일생동안 가장 많은 시간을 곁에서 지내는 가족을 생각해 보자. 가족의 삶과 가족의 마음을 과연 들여다볼 수 있는가. 가족의 마음조차 우리는 알 수가 없다. 그렇다는 것은 우리는 평생동안 그 어떤 사람의 마음도 알 수 없다는 말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을 읽고 끊임없이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을 헤아리려 노력해야 한다. 그런 반복의 시간만이 인간에 대한 이해의 범주를 넓힐 수 있게 돕는다.
최태성 작가는 길을 잃고 방황할 때마다 역사에서 답을 찾았다며 역사의 쓸모라는 책을 지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처럼 인류는 끊임없는 진보 속에서도 꽤나 단조로운 보편성을 동시에 품고 살아간다. 보편적이라는 것은 적용 가능성이 높다는 말과 같다.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 역시 역사의 일부이며 우리의 인생이 특별하지 않다면, 설령 특별하다고 할지라도 그 특별함 역시 역사 안에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는 그 보편성에서 아마도 많은 답을 찾아낼 수 있으리란 기대를 할 수 있게 된다.
인생은 대화다. 대화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질문이다. 대부분이 시답지 않은 질문이지만 때로는 아주 중요하고 밀도 높은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사람이라면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신과 세상에게 던질 수밖에 없는 질문에 대해 인류의 지성들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여 가장 밀도 높은 생각을 압축시켜 답을 내어놓았다. 철학은 그래서 인간이 직면하는 거의 모든 실존적 질문에 답을 하고 있다. 삶이 혼란스러워 방황하게 될 때 마음을 뉘일 곳을 찾는 사람은 종교를 찾고 답을 찾아보고자 하는 사람은 철학을 찾게 된다.
육체를 가진 인간이라면 누구나 오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과 문화는 인간의 오감이 느낄 수 있는 가장 작은 것부터 가장 큰 것까지의 진동을 체험하도록 돕는다. 그리고 그런 경험은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 나아가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 대중가요만 듣던 사람이 클래식을 듣고 전율을 느끼게 되는 순간, 그림을 몰랐던 사람이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게 되는 순간, 배를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던 사람이 음식이 제조되는 과정에 매료되는 순간, 지방간이 있어 비만과 당뇨를 걱정하던 사람이 운동을 통해 자신의 미세한 근육의 움직임을 스스로 통제할 수 있게 되는 순간, 이런 순간들은 아주 잠시동안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다 놓는다. 그리고 그런 순간들이 모여 나는 새로운 세상으로 한 발 나아가게 된다. 남들이 알건 모르건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된다. 새로운 세상에 진입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사람은 지대한 황홀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러니 어찌 교사가 인문학을 배우고 익히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인문학은 개인적 삶의 도약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하지만 앞서 말했듯 조력을 제공해야 하는 사람에게 너무도 큰 도움이 된다. 아이는 어른보다 더 많이 혼란스럽고 더 많이 흔들린다. 어른이라고 흔들리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아이보다는 덜 흔들려야 하는 것이 옳다. 흔들리더라도 조금은 유연하게 흔들릴 수 있도록, 위태롭더라도 최소한의 안정감은 느낄 수 있도록, 인문학은 그렇게 나를 돕고 내가 만나는 아이들을 도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