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하는 것을 명명할 수 없을 때
아들: 받침은 쌍기역이랑 쌍시옷만 있어?
아빠: 응 글자 받침에는 ㄴㅎ처럼 서로 다른 모양인 두 개의 자음이 오기도 하는데 같은 모양이 두 개 올 수 있는 건 쌍기역과 쌍시옷만 있어
아들: 그럼 처음 앞에 오는 건?
아빠: 처음 올 수 있는 자음은 쌍디귿도 있고 쌍비읍, 쌍지읒도 있지
아들: 쌍이응도 있어?
아빠: 아니 쌍이응은 쓸 수 없어
아들: 아니야 있어. 응가를 세게 말하면 쌍이응이야
응가와 응~~가는 분명 들을 때 소리의 세기가 다르다. 하지만 응가나 응~~가나 둘 다 글로 표현할 때는 동일하게 응가로 적는다. 나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생각이 아이의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을 목격할 때면 대자연 앞에서 경탄할 때와 비슷한 감정을 느낀다. 그것은 황홀하면서 즐거운 경험이다.
응가와 응~~가처럼 실생활에서는 분명 다른 소리로 발현되고 있지만 그것을 구현해 낼 글자가 마땅히 없어 두 소리의 차이를 구분 짓지 않고 같은 형태로 표현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다. 아이의 말을 가만히 생각해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응가를 좀 더 세게 표현하기 위해 끙아, 끙가 같은 글자를 써봐도 무언가 마뜩치가 않다.
언어학자가 아닌 탓에 이응이 왜 겹받침에도, 된소리에도 포함되지 못했는지 몰라 응가를 세게 적고 싶다는 아이의 마음을 달래줄 마땅한 말을 떠올리기 어려웠다.
이름을 붙여 그것의 존재를 확정 짓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훈련소에서 158번 훈련병으로 불릴 때와 이름으로 불릴 때, 부르는 사람과 불리는 사람의 관계에는 미묘한 차이가 존재한다. 수업 시간에 거기 뒤에서 세 번째 줄 학생이라고 불릴 때와 이름을 불릴 때 학생의 반응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전자는 독자성이 없는 무색무취의 존재로 다루어짐을 뜻하고 후자는 존재의 유일함을 인정받았기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을 주고 싶은 존재가 생기면 그 존재를 정확히, 혹은 새로이 명명하고 싶어 한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에 태명을 짓는 행위, 친한 친구를 별명으로 부르는 행위, 사랑하는 사람을 애칭으로 부르는 행위들이 그렇다.
방귀대장 뿡뿡이라는 캐릭터는 있는데 응가대장 캐릭터는 왜 아직 없는 걸까. 소리로 존재를 명명할 수 없다면 캐릭터로라도 그 존재를 그려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응가와 끙가는 분명 다르다. 다른 것은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 사과라고 해서 다 같은 사과가 아니고 강아지라고 다 같은 강아지가 아니다. 자세히 들여다볼 때 비로소 미세한 차이를 인식할 수 있다. 그것은 관심이자 애정이다. 우리는 그제야 제대로 된 관계로 진입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