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여운 아이의 세상에 광명이 비추는 순간
(노래가 흘러나온다)
꿈꾸지 않으면~ 사는 게 아니라고~
아들: 아빠 꿈꾸지 않으면 어떻게 돼?
아빠: (무슨 의도인지 못 알아듣고) 응?
아들: 꿈꾸지 않으면 어떻게 되냐고
아빠: (흘러나오는 노래를 듣고 상황을 파악한다) 이~ 아무 일도 안 생겨. 꿈이 없어도 괜찮아
아들: 나는 맨날 꿈꾸는데
아빠:(잘못 파악했음을 깨닫고) 아~ 그 꿈~ 무슨 꿈을 그렇게 맨날 꿔?
아들: 몰라 일어나면 기억이 안 나
아이는 언어의 다중적 의미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자신이 알고 있는 대로만 곧이곧대로 해석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위 사례처럼 "꿈꾸지 않으면"이라는 노래가사의 "꿈"을 장래희망이나 미래에 대한 청사진으로 해석하지 못하고 잠잘 때 발현되는 무의식적인 현상으로만 이해하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은 아이의 귀여움이 폭발하는 지점인데 아이의 이런 모습에 어른들은 웃음을 터뜨리며 그 귀여움에 어쩔 줄 몰라 몸서리치곤 한다.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를 읽고 있었다. 1984에서는 전체주의 사회를 유지 강화하기 위해 신어라는 새로운 언어 체계를 만든다. 이는 새로운 언어라기보다 그저 기존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축소, 삭제한 것에 불과하다. 예를 들면 good과 bad라는 반대되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다면 bad(나쁘다)를 삭제하고 ungood(좋지 않다)으로 그 표현을 대신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나쁘다란 개념 자체를 지워버리고 좋지 않다는 말로 비판의 강도를 약화시키고자 함이며 궁극적으로 피지배계층의 사고의 폭을 제한함을 목적으로 한다.
비트겐슈타인이 "내 언어의 한계는 내 세계의 한계를 의미한다"라고 말했듯 인간은 자신이 사용하는 언어의 폭과 깊이만큼 세계를 인식하며 살아간다. 사과라는 말을 배우기 전의 아기들은 사과를 봐도 사과가 무엇인지 표현할 수 없고 사과가 무엇인지조차 모른다. 그저 '빨갛고 동그랗고 달콤함 어떤 것'쯤으로 두루뭉술하게 인식하고 표현할 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영역과 어휘만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에 어린 시절 어휘를 확장하려는 노력은 몹시 중요하다. 모든 운동은 관성의 법칙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자본이 그렇고 지식이 그렇고 말과 행동이 그렇다. 커지던 것은 더욱 커지려 하고 멈춰있는 것은 계속 멈춰 있으려 한다. 관성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막대한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저게 뭐야?를 끊임없이 물어보던 아이가 제법 커서 이제 스스로 책을 읽는다. 그리고 때때로 "오?!" 같은 소리를 내며 감탄과 경탄 어린 눈빛을 빛내곤 한다. 아마 자신이 알고 있던 어떤 것들이 서로 연결되거나 보다 선명하게 인식되는 경험을 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이는 그렇게 자신의 세계를 끊임없이 확장하고 있다. 어디 즈음에서 아이의 세계가 확장을 멈출지 알 수 없지만 가능하다면 그 확장하려는 성질이 불씨를 꺼뜨리지 않기를 바란다. 꿈이라는 하나의 단어를 듣고도 다양한 생각을 떠올릴 수 있기를, 좁은 언어의 감옥에 갇혀서 협소한 세계에 매몰되지 않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