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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20. 2020

셋, 둘, 하나 그리고...

흔적이 남기고 간 서글픔

이제는 외할머니 혼자서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계신다.


 어린 시절 나는 외갓집이 좋았다. 엄마는 6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다. 하여 나는 외갓집의 첫 손주가 되었다. 어느 집이나 으레 그러하듯 첫 손주였기에 예쁨을 많이 받고 자랐다. 세월이 흘러 삼촌과 이모들이 시집 장가를 가서 사촌 동생들까지 생기자 외갓집은 그야말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삼촌에 이모에 집의 식구들까지 다 합치면 대략 20명도 넘는 대가족이 한 집에 모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게다가 외갓집엔 외할머니 외할아버지 말고도 한 분의 할머니가 더 계셨다. 외할아버지의 어머니, 우리가 상 할머니라 불렀던 증조할머니까지 건강하게 살아 계셔서 가끔 외할머니와 부엌에서 식사 준비를 하며 다투던 모습이 더해져 시끌 시끌했던 집에 더욱 활기를 더했다.


 어린 시절  기억에 외갓집은 꽤나 컸다. 그 많은 식구들을 구석구석 수용했던 것을 생각해봐도 그렇고 마루엔 아이들을 위한 그네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마당엔 샌드백이 설치되어 있었고 강아지도 여러 마리 키웠던 것 같다. 


 어떤 날은 온돌이 따듯하게 달궈주어 뜨뜻해진 안방에 누워서 땀을 쫄쫄 흘리며 잠을 자기도 하고, 어떤 날은 할아버지 방에 가서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잠이 들기도 했다. 삼촌 이모들이 모여있는 방에 가면 언제나 나는 주인공이 되었다. 그야말로 행복할 수밖에 없는 완벽한 할머니 댁이었다.

그렇게 신나게 놀다 보면 어느덧 하루 정도는 훌쩍 지나가버려 금세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되곤 했다.

아버지의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향하는 순간이면 외갓집 대문 앞에서 언제나 세 명의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웃으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 내가 스무 살 무렵 고령이었던 증조할머니가 먼저 세상에 작별을 고했다. 아흔넷의 나이로 기억한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손주들 김장 김치를 손수 담가주셨을 정도로 정정하셨고 쉬지 않고 일을 하셨다. 특별한 지병은 없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저 나이 듦에 따라 자연스레 기운이 빠져 돌아가신 것이다. 이 세상에 호상이라는 단어가 과연 설 자리가 있는 것인가 의문이 들지만 사람들은 호상이라고 하였다. 대학 입학 선물이라고 상 할머니가 사주셨던 자전거를 도둑맞았을 때엔 도둑놈에게 진정으로 저주를 퍼부었다.


 상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즈음해서 외할아버지는 당뇨와 치매로 요양병원에 모셔졌다. 가끔 정신이 온전해질 때면 그 꼿꼿하고 호랑이 같은 성품에 본인이 병원에 계신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지 외가로 잠시 돌아가거나 자식들 집에 잠깐씩 머무르곤 했다. 그러기를 5년 정도 반복했을까. 70대 중반의 연세로 외할아버지도 고인이 되셨다.


 그 후로 외갓집을 몇 년간 가지 않았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셨기 때문은 아니다. 삼촌 이모들과 우리 부모님 사이에 얽힌 여러 가지 문제들을 알게 된 후 그분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취업 후 내 차가 생기고 나서야 오직 내 뜻대로 할머니를 보러 갈 수 있게 되었다.

오랜만에 가본 외갓집은 예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렇게 커 보였던 집은 생각보다 작았고, 오랜 세월을 그곳에서 버티고 있었던 탓에 할머니만큼이나 많이 늙고 지쳐 보였다.

방마다 가득 차 있던 사람들은 이제 다들 일가를 이루어서 명절이 되어도 모이기 힘들고 식구가 많아 식사를 두 번 세 번씩 나눠서 하던 풍경도 이제는 볼 수 없게 되어버렸다.  


 서글프다. 셋이었다가 둘이 되고 둘이었다가 혼자가 되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나에게는 몹시도 서글프게 보였다.


 슬픔과 서러움 서글픔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책 "보통의 언어들"을 쓴 작가 김이나는 이렇게 설명한다. 


 슬픔이란 보다 넓은 의미의 괴로움이며 이유를 헤아리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 서러움이란 울던 아이에게 밥을 한 숟갈 떠먹여 주고 싶은 것처럼 주체할 수 없는 아픔 같은 것, 서글픔이란 정작 본인은 슬프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나의 감정이 개입되어 슬프게 보이는 것이라며, 누군가를 서글프게 본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이전의 히스토리를 알고 있다는 것이라는 말도 덧붙이고 있다. 


 나는 이런 작가의 말을 빌어 외갓집 대문 앞에 홀로 서서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외할머니를 보며 느껴지는 감정을 서글픔이라 정의하기로 했다. 앞으로 할머니를 뵈러 갈 때마다 이런 서글픔을 느끼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 생각 때문에 다시 한번 서글퍼졌다. 비록 혼자 서서 인사를 건네는 외할머니의 모습이 서글프게 느껴지더라도 기회가 될 때 한 번이라도 얼굴을 더 보고, 보여드리는 것이 서글픔을 조금이라도 덜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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