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너무 좋아서
아들: 아빠 언제 나이를 먹어?
아빠: 1월 1일이 되면 한 살 더 먹지
아들: 그럼 언제 나이를 안 먹어?
아빠: 나이를 안 먹을 수는 없어
아들: 나이 안 먹고 싶어
아빠: 응? 왜 나이를 안 먹고 싶어?
아들: 나는 다섯 살이 좋아서
빨리 나이를 먹어서 형아가 되고 싶다고 재잘대던 다섯 살 아이의 입에서 나이 먹고 싶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왜 나이가 먹기 싫은지 묻자 아이는 장난감을 계속 가지고 놀고 싶어서라고 답한다. 나이를 먹으면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없다고 누가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아이는 어느새 장난감은 어린아이들만 가지고 노는 것이라는 생각을 내면화한 모양이다.
나이를 먹고 어른이 되어도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도 된다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지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어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여전히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에 아이에게 건넨 말의 진위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장난감은 아이들이나 가지고 노는 것이라는 생각이나 공무원은 변화를 싫어한다는 생각, 이런 것들은 이미 고착화된 패러다임이다. 패러다임으로 정착되었다는 것은 보편적인 정당성을 획득하여 널리 통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성과 개성을 근거 삼아 모두 그런 것은 아니라며 부정하고 싶지만 이미 많은 사람들의 경험 혹은 판단이 쌓여 굳어진 집단적 생각의 덩어리를 전복시키기는 어려운 일이다.
가지고 노는 대상의 형태만 바뀌어갈 뿐이지 인간에게 장난감이 필요치 않은 시절은 없다. 어린 시절엔 인형이나 로봇이 최초의 장난감 노릇을 할 테지만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그 형태는 지속적으로 변형된다. 형태가 달라질 뿐 장난감이라는 본질적 존재가 인간에게 언제나 필요한 것이라고 한다면 나이를 먹고 싶지 않다는 다섯 살 아이의 말은 구십 살 노인의 입에서 나올 때와 별반 큰 차이가 없는 말이 된다. 우리에겐 언제나 장난감이 필요하기 때문이며 나이를 먹기 때문에 더 이상 그 장난감을 가지고 놀 수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에게나 슬픈 일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기쁨을 누리는 다섯 살이 좋은 아이가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또 다른 어떤 것들을 좋아하게 될지 한껏 기대가 된다. 그것이 무엇이건 기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모두 다 좋다. 기쁨과 즐거움만큼 삶을 충만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달리 없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