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조제와 츠네오, 우리 모두 그런 때가 있었다

by 정 호

먹먹하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포스터를 볼 때면 언제나 먹먹한 마음이 든다. 그 마음의 근원은 "두고 온 것"과 "나에게 선택권이 없었던 것"에 대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어딘가에 두고 온 어떤 것에 관한 기억을 품고 살아간다. 선택할 수 없이 그저 덤덤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경험 또한 마찬가지다.


살면서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않은 이가 있을까. 한 번이라도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소리를 누군가에게 들어본 적 있는 이라면, 그리고 결국 현실적이라 생각되는 선택을 집어 들었던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무겁게 들쳐 업었던 무언가를 어딘가에 덩그러니 내려놓고 터벅터벅 걸어본 사람이리라. 그런 측면에서 현실주의자는 회피주의자고 봐야 할는지도 모른다. 현실을 선택했다는 것은 무언가를 회피했다는 뜻일 테니까.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말은 어디에서 나온 말일까? 그 사람은 결혼 상대로는 좋은데 연애상대로는 별로라는 말, 반대로 연애 상대로는 좋은데 결혼 상대로는 별로라는 말, 이런 말들은 이미 연애와 결혼을 별개의 카테고리로 분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결혼이 연애의 연장선이 아닌 완벽히 다른 기준점으로부터 출발하는 선택임을 너무나 공공연하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것은 "현실적"으로 생각하라는 말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조언처럼 전해진다. 어떤 선택이건 후회 없는 선택은 없겠지만 이런 방식의 생각으로 결혼을 감행하는 사람들 중 다수는 어느 순간 츠네오처럼 펑펑 울음을 터뜨린다.


단순히 연애와 결혼에 있어서만 "두고 온 것"이 인생의 발목을 잡는 것은 아니다. 청운의 이루지 못한 꿈을 어느 순간 포기하고 먹고살기 위해 생업 전선에 뛰어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들 역시 "두고 온 꿈"을 평생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그곳에 꿈을 두고 올 수밖에 없었던 이유 역시 다른 게 아니다. 현실적인 선택을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현실적인 선택은 언제나 무언가로부터 도피하도록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늘 미련을 남기기 마련이다.


선택할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보자. 영화에 충실히 공감하기 위해서 연애를 먼저 떠올려 본다면 나의 마음과 상관없이 이별을 통보받았을 때를 떠올릴 수 있다. 여전히 사랑하는 마음이 불타고 있으나 상대의 마음이 먼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을 바라만 봐야 할 때, 내가 그 어떤 노력을 해도 돌아선 사람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때, 우리의 관계가 나의 노력이나 의지로 바꿀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될 때, 나에게 선택권이 없음을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절망스러운 마음이 들게 한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고 하지만 생각해 보면 정작 중요한 것은 나에게 선택권이 없을 때가 더 많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시작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태어나는 나라를 선택할 수 있는가, 지역을 선택할 수 있는가, 부모와 형제를 선택할 수 있는가, 다니는 학교를 선택할 수 있는가, 하다 못해 하고 싶은 말도 상황에 따라 할 수 없을 때가 있고, 먹고 싶은 메뉴조차 나에게 선택권이 없어서 남이 시키는 것을 먹어야 될 때도 있다.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회피와 선택 불능의 경험이 있다. 그래서 츠네오와 조제에게 공감하게 된다.


언젠가 니가 사라지고 나면 나는 길 잃은 조개껍질처럼 혼자 깊은 해저에서 데굴데굴 굴러다니겠지.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아 - 조제 -

조제는 성장한다. 외부와 단절된 채 할머니에게만 의지하며 오직 집과 할머니가 밀어주는 유모차 안이 세상의 전부였던 조제에게 츠네오는 새로운 세상을 보여줄 가능성을 들고 나타난 메시아였으리라. 사랑의 시작은 다양하다. 친구 같아서, 재미있어서, 편안해서, 멋져 보여서, 동경하는 마음에서, 닮고 싶어서, 비슷한 점이 많아서, 싸우다가 정이 들어서, 이처럼 다양한 형태의 사랑의 씨앗이 존재하지만 조제의 마음에 심긴 츠네오에 대한 사랑의 씨앗은 시작부터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다. 그리고 조제는 그 위험성을 서서히 알아차리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삶의 일부임을 인식하고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치며 조제는 성장한다. 할머니의 도움 없이는 집 안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던 조제는 츠네오와 헤어진 뒤 혼자서 꿋꿋하게 세상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다.


동생: 형!
츠네오: 응?
동생: 지쳤어?
츠네오: ....

츠네오는 조제를 집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둘은 함께 지내던 도시를 떠나 츠네오의 고향으로 향한다. 운전을 하며 여러 상황이 생기고 츠네오는 드디어 "현실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장애를 가진 여자를 평생 내가 책임질 수 있을까. 앞으로 닥칠 수많은 변수와 고난을 이겨낼 수 있을까. 결국 집에 가기를 포기하기로 마음먹은 츠네오는 집에 전화를 건다. 츠네오에게는 남동생이 하나 있다. 형에게 장애를 가진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것을 알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던 남동생은 에 오기로 했던 형이 오지 못할 것 같다는 말을 전하자 지쳤냐며 정곡을 찌른다. 네오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한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호랑이를 보러 가고 싶었다는 조제의 말이 뼈저리게 슬프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호랑이조차도 사랑하는 사람만 곁에 있다면 두 손 꼭 잡고 마주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 정작 무서운 호랑이를 마주하는 순간 산산조각 나 버렸다. 조제와 츠네오에게 가장 무서운 호랑이는 현실이었으니까. 조제에게 호랑이는 무서운 현실이었고 물고기는 자신이었다. 호랑이는 츠네오와 함께 봤지만 물고기를 보러 간 수족관은 문을 닫고 말았다. 결국 현실은 함께 직면했으나 츠네오는 조제의 세계에 가닿지 못한 것이다.


이별의 이유는 여러 가지였겠지만... 아니, 사실은 하나다. 내가 도망친 것이다. - 츠네오 -

조제는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는 사랑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이룩한다. 반면 츠네오는 조제에 비해 늘 한발 뒤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풍기며 끝내 "현실"을 핑계 삼아 사랑으로부터 도망치고 만다.


우리는 모두 조제였으며 츠네오였던 적이 있다. 처절하게 을의 입장이었던 그때, 부끄럽게도 도망치고 말았던 그때. 하지만 그것도 모두 어쩔 수 없는 생의 순간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거의 나와 만나게 하는 조제와 츠네오는 그래서 처절하게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사무치게 반갑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