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루먼이 죽는 걸 생중계할 셈입니까?"
"그가 태어나는 것도 생중계했습니다"
돈은 어디까지 인간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탄생과 죽음, 한 인간의 일생이 자본을 위해, 자본에 의해, 치밀하게 도륙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무기력감을 느낀다. 돈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는 무수히 많지만 트루먼 쇼는 그중에서도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진다.
트루먼은 희생자다. 철저한 자본의 논리에 의해 출생 순간부터 그는 일생을 착취당한다. 운이 좋아 삶이 아직 붕괴되지 않았을 뿐이지 거대한 자본 권력과 마주할 일이 생기기라도 하는 날엔 언제라도 금세 트루먼의 삶처럼 뒤틀리고 바스러질 수 있는 것이 우리네 일상이라고 생각하니 갑갑하고 두려운 마음이 든다. 돈은 그렇게 인간을 가장 비인간적으로 만드는 도구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스스로 이미 돈의 노예가 되어있다는 사실은 알지 못한 채(애써 외면한 채) 돈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경멸한다.
트루먼은 전무후무할 슈퍼스타다. 전 세계인이 자신의 출생부터 첫걸음마, 첫 키스에 이르러 세트장을 벗어나기까지의 생애 전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본인은 그로 인한 금전적 이득을 전혀 획득하지 못하였으나 유명세만큼은 인류 역사상, 그리고 앞으로도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어 보인다. 트루먼은 타의에 의해 자신의 모든 일상이 공개된 삶을 살아왔다. 그것은 유명세를 불러왔지만 자유와는 거리가 먼 삶이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요즘은 트루먼이 되기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물건과 서비스를 파는 것을 넘어서 이제 우리는 인간의 가장 내밀한 내면까지도 팔아먹는 세상에 살고 있다. 연애를 팔고, 이혼을 팔고, 육아를 판다. 하다 하다 이제는 부부관계를 얼마나 쉬었는지까지 방송으로 편성하고 있으니 그야말로 가장 내밀한 개인적 삶이 자본으로 치환되는 것을 우리는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니즈가 있어 방송이 편성된 것인지 방송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을 바라보게 되는 것인지는 닭과 달걀만큼 우선순위를 가리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선순위야 어찌 되었건 그것을 바라보고 열광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바로 자본이 힘을 잃지 않고 무한 증식할 수 있는 동력원이 된다. 욕을 하면서도 자극으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하는 인간의 본성은 그렇게 자본의 확장을 돕는 불쏘시개가 된다.
"다른 채널에선 뭐 하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다. 30여 년을 함께해 온 트루먼 쇼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그간 함께해 온 세월이 무색하게도 곧장 새로운 프로그램을 찾는다. 한 사람의 일생이 담겼음에도 불구하고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순간 그것은 그저 "쇼"에 불과할 뿐이다. 형제처럼, 자식처럼 생각하고 그의 온갖 희로애락에 함께 울고 웃었던 기억조차 쇼가 끝나면 사라질 한낯 신기루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본질적으로 혼자일 수밖에 없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트루먼을 바라보며 울고 웃었던 순간들은 비록 찰나의 순간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모두 진심이었을 테다. 다만 인간의 진심과 공감은 일반적으로 지속성이 떨어지는 것이 최대 약점이다. 진심과 공감뿐 아니라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순간적으로 발산되었다가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사그라든다. 일정 시간이라는 것은 사람마다 편차가 있겠으나 대개는 몇 년 이상 지속시키기 어렵다. 따라서 트루먼 쇼가 끝나자마자 다음 쇼를 찾는 사람들을 비난할 필요는 없다. 인간은 원래 그렇게 금세 잊고, 새로운 자극에 취약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진실이 없지만... 내가 만든 그곳은 다르지, 이 세상은 거짓말과 속임수뿐이지만 내가 만든 세상에선 두려워할 게 없어. 두렵지? 그래서 떠날 수 없지. 자넨 여기에 속해 있어. 내 세상에..."
트루먼 쇼의 총책임자는 트루먼이 자신의 삶이 쇼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세트장 밖으로 나서려 하자 그를 설득하려 한다. 이것이야말로 가히 가스라이팅의 교과서라 할 수 있다. 가짜를 진짜인 것처럼, 두려워해야 할 것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 것처럼, 감시와 검열이 일상인 곳을 평안과 안온함의 상징인 것처럼.
다행스럽게도 트루먼은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기를 선택한다. 통제된 삶, 가축으로서의 삶은 안온하고 편안할 테지만 끝끝내 자의식을 갉아먹는다. 트루먼은 아마도 그것이 가장 두려웠을 테다. 미지의 세상에 한 발을 내디뎌야 하는 두려움과 자신을 영원히 알지 못한 채, 혹은 자신을 스스로 죽인 채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 가운데 그를 더 두렵게 만든 것은 분명하게도 후자였으리라.
그래서 그의 마지막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도 밝고 진실하다. 억지스럽고 과장된 웃음이 아닌 편안한 미소가 그의 마음을 대변한다. 그는 미지의 세계가 결코 두렵지 않았으리라.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자신의 선택에 후회하지 않았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