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더맨 - 노 웨이 홈

아이에서 어른으로

by 정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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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물로 치부되어 왔던 영웅들의 이야기, 즉 히어로물에서는 주인공의 "성장"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그것은 애초에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성장하는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컴퓨터 그래픽 기술만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영웅물의 이야기 전개 과정 또한 점점 발전해 나가며 만화나 애니메이션이 더 이상 아이들만 즐기는 오락 영화에 머물기 아까운 수준으로 세련되어지고 있다.


얼마 전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을 보고 왔다. 스파이더맨은 고등학생이다. 용맹무쌍한 일반적인 히어로들과 달리 소심하고 유약하지만 올바른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고자 노력하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소년이다.


스파이더맨의 특징 중 하나는 철저한 익명성이다. 정의를 위해 싸우기는 하지만 다른 히어로들처럼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다. 하긴 생각해보면 국가마저도 의존할 정도의 재력을 갖춘 세계적 기업가인 아이언맨이나 애초에 이 세계의 사람이 아닌 신적 존재인 토르 같은 영웅들은 애초에 자신의 존재를 숨길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언제든 본인의 재력이나 신적인 능력으로 얼마든지 익명의 세계로 숨어버릴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달랐다. 평범한 고등학생 신분에 돈도 없이 이모네 집에 얹혀사는 형편이었으니까. 학교도 다녀야 했고 경제적으로 독립을 한 상태도 아니었으며 강인한 신체적 능력이 있었을 뿐 그것이 세상 사람들의 눈과 입으로부터 도망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스파이더맨의 가면은 어쩌면 캡틴 아메리카의 방패처럼 스파이더맨을 지켜주는 가장 커다란 방패이자 무기였는지도 모르겠다.


스파이더맨이 등장했던 이전의 영화들에서는 그의 강력한 신체능력에 비해 스파이더맨의 멘탈은 딱 고등학생 수준에 머물러 있다. 궁금한 것은 바로바로 물어봐야 직성이 풀렸고 생각난 것이 있으면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했으며 감정적이었고 외부 변화에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왔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에게는 늘 의존의 대상이 필요했는데 가깝게는 이모와 여자 친구에게 의존했고 히어로들 사이에 있을 때에는 아이언맨과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의지하며 쉴 새 없이 흔들리는 자신의 정신을 부여잡기 위해 외부의 조력자에게 의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어린 영웅의 성장 이야기가 늘 그러하듯 스파이더맨 역시 매력적인 조력자들이 등장한다. 다른 히어로물에서도 물론 주인공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존재들이 등장하지만 스파이더맨은 주인공이 미성년이라는 점 때문에 더욱 그 점이 강력하게 부각된다.


전작 스파이더맨: 파 프롬 홈에서 빌런 미스테리오가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온 세상에 까발린 탓에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은 시작부터 스파이더맨의 가면을 벗겨내며 출발한다. 익명성이 사라지자 온갖 악재들이 어린 청년 스파이더맨을 향해 돌진한다.


가족은 건드리면 안 되지


내가 괴로운 것은 참을 수 있어도 가족이 괴로운 것은 참을 수 없는 것이 영웅의 마음이자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느낄법한 감정일 테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족의 죽음과 가장 가까운 친구들이 자신 때문에 피해를 입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스파이더맨도 그와 같은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닥터 스트레인지를 찾아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라는 것을 지워달라는 부탁을 하게 된다. 단, 자신이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게 해 달라는 조건을 달면서. 하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쉽게 돌아가던가. 복잡한 요구는 주문의 실패를 발생시키고 그로 인해 다른 차원의 인물들을 스파이더맨의 세계로 불러오게 된다.


하나를 바꾼다고 내가 원하는 대로 결과가 바뀌는 것이 아니듯 세상만사는 알 수 없는 연결고리들로 얽혀있어 하나를 건들면 생각하지 못한 변수들의 변동성으로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스파이더맨은 자신의 소원이 결국 욕심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가족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지워달라고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요청한다. 의미 있는 타자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자신의 욕심을 버리고 단절과 고독의 길을 선택한 셈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감당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 감정과 충동에 휘둘리는 떼쟁이 어린아이에서 타인의 행복을 기원하며 완벽한 고독과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수행하는 성숙한 어른으로 한발 내딛는 어린 영웅의 모습을 바라보며 코끝이 찡해지는 기특함을 느끼며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늘 타인에게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한다. 특히 나와 특별한 관계가 없는 사람보다는 깊은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 즉 나에게 의미 있는 타자들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은 더욱 확장된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고 인간은 늘 인정에 목마른 존재인 것은 사실이나 그것을 늘 완벽하게 충족시키기는 힘든 일이다. 특히 나의 욕구가 의미 있는 타자의 불행을 담보 삼아 충족시킬 수 있을 때에는 필연적으로 고뇌의 시간이 찾아온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내 것을 내려놓을 줄 알게 되는 것. 그 순간이 바로 어른이 되는 순간은 아닐까. 사랑을 할 때 성숙해진다는 것은 그래서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