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이큰의 엄마 버전을 생각하며 보기 시작한 영화 <쓰리 빌보드>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형태로 이야기를 풀어낸다. 흔히 어떤 사건의 피해자들은 절규하며 가해자를 원망하고 자기 목숨을 걸고서라도 복수를 감행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동원한다. 하지만 <쓰리 빌보드>에는 피해자의 분노를 촉발시킨 대상이자 극의 결말을 통쾌하게 마무리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가해자가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는 복수는 더 커다란 복수를 낳고, 분노는 엉뚱한 방향으로 불똥을 튀긴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이야기한다. 살인범이 야기시킨 분노는 딸을 잃은 밀드레드를 통해 마을 전반으로 퍼져나간다. 불행한 피해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분노로 인해 다른 인물들 역시 분노를 품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분노는 분노를 일으킨 대상 대신 엉뚱한 곳을 향해 흘러가 예상치 못한 새로운 피해자를 양산한다.
주인공 밀드레드는 강인하다. 강인하다기보다 악에 받쳐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라면 누군들 그러하지 않을까. 사건 해결을 위해 가진 재산을 몽땅 털어 경찰서장을 상대로 광고를 내걸고 언론에 인터뷰를 하는 등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려는 어머니의 마음을 과연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같잖은 동정심과 하찮은 이해심으로 포장한 타인의 위로는 그녀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녀가 바라는 것은 오직 범인의 처벌뿐이다.
영화 초반 밀드레드는 고립된다. 경찰서장은 지역에서 인망 있는 유지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췌장암 말기라는 불행 서사까지 갖춘 탓에 피해자인 밀드레드는 순식간에 나쁜 인간이 되어버린다. 지역 주민들은 수근덕거리고 아들의 친구들은 그녀의 차에 음식을 던진다. 교회의 목사와 경찰 간부들은 췌장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에게 꼭 그렇게까지 해야겠느냐며 광고를 서둘러 내릴 것을 촉구한다. 그녀의 아들은 안 좋은 기억을 잊고 지내기 위해 애쓰고 있는데 굳이 광고를 해서 악몽을 자꾸 떠오르게 하냐며 그녀를 몰아세우고, 헤어진 남편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며 이쯤에서 그만하자고 그녀의 사기를 꺾는다. 하지만 그녀는 끝끝내 자신과 딸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다.
영화는 여러 가지 화두를 던진다. 분노는 어떻게 전염되는가, 피해자는 순결하고 약해야 하는가, 그릇된 충성심은 어떤 악행을 가져오는가, 죽음과 인망 앞에서 무능함이 빚어낸 피해자들은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복수는 나쁘기만 한 것인가, 언제나 선한 사람 언제나 악한 사람이 존재하는가.
주인공 밀드레드는 피해자이지만 선해 보이지 않는다. 목사에게 꺼지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차에 음식을 던진 아들 친구들을 폭행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장애인과 함께 식사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경찰서에 불을 지르기까지 한다. 물론 이러한 모든 행위는 불의에 대한 저항에서 발생한 것이기는 하나 일반적으로 우리가 상상하는 선함과는 거리가 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자. 피해자들은 과연 선한 존재여야만 하는가. 혹은 피해자는 선한 존재로 비쳐야 하는가. 처절한 불행을 겪고 그 불행이 제도권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인간은 과연 선한 존재로 남아 있을 수 있을까. 그런 고통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이 악에 받쳐 쏟아내는 고함을 바라보며 혀를 차는 수많은 사람들은 과연 선한가.
몇 년 전 아버지는 기획부동산 사기에 당했다. 가해자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였다. 집에 날아온 재산세 고지서를 보고 땅을 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때마침 TV에서 나오던 기획부동산 관련 뉴스를 보며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등기부등본을 열람해 봤다. 한창 부동산이 활황이었던 2010년대 후반, 사기꾼은 그렇게 기회를 포착해 약탈에 성공했다. 그동안 말아먹은 사업을 복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 자식과 배우자에게 나중에 깜짝 놀랄만한 선물을 주고 싶다는 생각, 남편이자 아버지였던 한 남자는 그렇게 또 한 번 힘들게 일궈온 자신의 시간과 자존심을 갈취당했다. 변호사를 선임해서 사기꾼을 경찰에 고발했으나 1년에 걸친 수사 결과는 허무하게도 불송치 결정이었다. 사기 혐의가 없어 재판으로 넘길 수 없다는 뜻이다.
사기를 당한 사람이 분명히 있는데 사기를 친 사람이 없다는 경찰의 조사결과를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법은 왜 존재하는 것이며 제도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의구심이 들었다. 사건과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가해자의 존재를 명확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법은 그를 가해자로 판단하지 않는다. 사기꾼들이 살기 좋은 나라라는 말을 실감한다. 법조문을 빠져나갈 수 있게 치밀하게 계획된 그들의 계획사기는 손쉽게 법망을 벗어난다. 경찰서에서 날아온 허무한 수사결과 통지서를 눈앞에 두고 변호사는 자기도 사기를 당했던 적이 있다며 위로한다. 피해자는 언제나 명확한 사건의 해결을 원하지 도움 되지 않는 위로를 원하지 않는다.
세상에는 수많은 억울함이 있다. 억울한 사기, 억울한 죽음, 억울한 폭행, 꼭 범죄와 관련한 것이 아니더라도 억울함은 우리 삶 곳곳에서 호시탐탐 비집고 들어올 기회를 엿본다.
영화에서는 여러 장면을 통해 회개와 화해 그리고 용서에 다다르는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이는 과연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인가. 아니 가까스로 용서할 수 있는 경지에 도달해 낸다고 한들, 그것은 과연 좋은 결말일까. 아니면 궁지에 몰린 쥐가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할 수밖에 없는 최후의 결단에 불과한가. 해소할 대상이 없는 분노를 해갈하기 위한 방법으로 용서 말고 다른 것은 정말 없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