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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Dec 03. 2023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어

알아차리고, 받아들이고, 고쳐나가고, 그것이 삶이다.

아들: 아빠 구구단 게임 하자.

아빠: 좋아~

아들: 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삼삼은?

아빠: 구! 구구단을 외자 구구단을 외자. 삼구?

아들: 이십사.

아빠: 어! 아닌데~ 틀렸어

아들: 아니야 말이 잘못 나왔어. (잠시 골똘히 생각한 뒤) 삼구는 이십칠이야


틀렸다는 말에 아니야! 하고 고래고래 목놓아 울던 녀석이 이제는 제법 틀린 이유에 대해 생각할 줄 알게 되었다. 게다가 기특하게도 제대로 된 답을 고민하여 내어놓기까지 한다. 수용능력과 메타인지가 조금씩 발달하고 있다는 뜻이다.


틀림을 다양성이라 착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치는 시대가 되었다. 다름과 틀림의 경계는 무릇 한 끗 차이일 테지만 명백한 틀림 앞에서도 다름을 주장하는 사람들 덕분에 적당히 피로했던 세상은 고도로 피로한 세상이 되어간다. 아무도 자신의 오류를 받아들이지 않는 세상, 그래서 더더욱 서로의 잘못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심하는 세상, 그 덕에 점점 더 무지의 평균이 상승하는 세상, 그럼에도 기술 발달에 힘입어 자신이 그 누구보다 똑똑하다는 착각에 빠져있는 사람들이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세상. 생각을 교류하며 살아가기에 최고의 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생각을 교류하기 가장 어려워진 세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현시대에 네가 틀렸다는 말 앞에서 2초의 멈춤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은 가히 현자에 가까운 사람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0.001초의 무서운 반사신경으로 자신이 틀리지 않았음을 반박하고 나선다. 수용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살다 보면 내 말이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스스로의 말과 행동이 모두 정답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기라도 한다는 듯 부정의 언어를 견디지 못한다. 그리고 그 순간은 때때로 한 인간의 가장 처량한 모습을 들춰내 다른 누군가의 기억 속에 그 처참하고 추악한 모습을 영원히 박제시킨다.


받아들임이 불가능한 이유는 메타인지가 발달하지 않아서일 수도 있고 메타인지가 발달하지 못한 이유가 수용 능력이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선순위를 따질 일이 아니라 꼬리물기처럼 무한히 반복되며 성장하고 상생하는 지적 발달과정이라고 봐야 옳다.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것인지 알 수 없는 인간관계처럼 수용능력과 메타인지의 관계 역시 어느 한 부분이 고장 나게 되면 나머지 부분이 제대로 작동하기 어려워진다. 단순히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메타인지가 필요한 것 아니다. 삶의 전반을 아우르기 위해 가장 필요한 능력이 바로 메타인지이기 때문이다. 고로 주체적인 삶, 자기만족적인 삶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능력이 메타인지인 이다.


불행한 사람이 점점 늘어나고 자살률이 끝 모르게 높아지는 이유도 어쩌면 메타인지의 부족, 받아들이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늘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도, 사회의 건강을 위해서도, 각자도생이나 아시타비(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같은 말의 유행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 렸다는 말에 고래고래 울고 소리치는 것은 영유아기에 끝냈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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