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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Jul 16. 2020

절묘한 균형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인가, 결코 잡을 수 없는 신기루에 불과한가.

간섭을 할까 말까,
간섭을 해야 한다면 어디까지 해야 할까.


'우당탕탕, 꺄르르르, 야~~ 야~~~'


 국어 수업시간, 공익광고 영상을 제작하기로 했다. 아이들은 그저 좋아한다. 에너지가 넘치는 초등학생의 특성상 가만히 앉아서 내용을 전달받는 수업보다는, 손이건 입이건 몸이건 본인들이 부대껴가며 참여하는 수업에 적극성을 보인다. 적극적인 것은 좋다. 그런데 시작만 적극적일 뿐 그 과정과 결과가 적극적이지 못한 경우가 많아서 고민이 될 때가 있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면 단위에 위치한 소규모 혁신학교다. 혁신학교일 뿐만 아니라 주변 학교들이 모두 혁신학교로 지정되어 혁신벨트로 묶여있다. 전국에서 손꼽히는 특수한 교육 환경에서 근무하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있는 셈이다. 혁신학교라는 존재가 우리나라에 태생한 지 십여 년의 세월이 지났다고 한다. 그동안 많은 활동가들과 선배 교사들이 혁신학교란 무엇인가 정의 내려왔고 혁신학교에 어울리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왔다.


 혁신학교에 2년째 근무하고 있다. 짧은 경력인 데다 이 학교가 첫 발령을 받은 학교이기 때문에 일반 학교와 혁신 학교가 어떻게 다른 것인지 개인적으로는 비교대상이 없어 아직까지 피부로 와 닿지 않는다. 다만 책과 특강, 그리고 동료 교사들과의 끊임없는 토론으로 혁신학교란 무엇인지, 우리가 근무하는 학교를 혁신 학교답게 만들기 위해서 무엇을 할 것인지 대강의 느낌을 잡으려 노력해 볼 뿐이다.


 자율성, 민주성, 개방성


 2년 동안 혁신학교에 근무하며 내가 내린 결론은 혁신학교는 일반학교보다 조금 더 자율성과 민주성 개방성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학교에서 자율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인가. 아이들을 자율적인 아이로 키울 수 있을 것인가. 자율적인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교사에게 어떤 자율권을 보장해 줄 것인가. 이것들을 고민하며 아이들이 무엇인가를 자율적으로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다양하게 제공하고 그 경험을 완결해 냄으로써 작은 성취감을 맛볼 수 있도록 수업과 행사를 계획하는 것이 혁신학교에 근무하는 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적인 교사 공동체, 민주적인 회의 문화, 민주적인 교사와 학생의 관계 등 학교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여러 분야에 걸쳐서 민주주의, 민주적이라는 말은 폭넓게 쓰이고 있지만 아직도 완벽히 달성하지 못한 과제처럼 남아있다. 초등교육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민주시민을 기른다는 말이 나와있을 정도로 민주성은 중요한 국책 과제로 여겨지고 있다. 하여 혁신 학교에서는 일반 학교보다 조금 더 혁신적으로다가 이 민주성의 발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주요 골자다.


 모든 혁신학교를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아니 지금 근무하는 학교가 교직 생활의 유일한 경험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미천한 경험이지만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풍월에 따르면 혁신학교는 지역사회와 연계를 많이 하고 있는 듯하다. 지역의 인력을 학교로 끌어와 아이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제공하고 지역민들의 일자리 창출 효과 및 사회공익적 가치 실현, 거기에 지역의 사회적 문화적 교류의 장으로써의 역할까지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개방성은 단순히 외부 인력을 학교 안에 얼마큼 들일 것인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외부와 얼마나 소통해나갈 것인가, 지역 사회의 인적 물적 자원을 얼마큼 활용하고 서로 시너지를 발휘해 낼 수 있는가가 모두 포함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세 가지는 모두 "허용" 그리고  "균형"과 관련이 있다.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가, 할 수 있는가, 하려 하는, 어느 지점에서 균형을 잡을 것인가가  포인트다.


 모든 혁신학교가 이런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내가 근무하는 학교가 지향하는 가치조차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동료가 있을 수도 있다. 그만큼 어떤 개념에 대해 정의 내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나의 좁은 식견으로 아마 혁신학교는 이러한 생각을 토대로 출발하지 않았을까 싶다.

기존의 학교들도 물론 구성원에 따라 그리고 그 구성원들이 내는 시너지에 따라 충분히 역동적인 에너지를 바탕으로 자율적이고 민주적이고 개방적인 학교를 꾸려갈 수 있을 테지만

이것은 순전히 운과 타이밍이 맞아 들어야 가능한 일이기에 무언가 제도적으로 틀을 만들어내서 그곳에서 인위적으로라도 운과 타이밍을 만들어내 보려는 시도는 아니었을까라고 이해하기로 했다.


 풀뿌리 민주주의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아래로부터 무엇인가 시작되는 일은 주도성을 바탕으로 자치 능력을 발현시킨다는 믿음이 있다. 위에서 아래로 지시하는 탑다운 방식은 고루한 것이고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바텀업 방식이 혁신적인 것이라는 믿음 아래 자율과 책임이 공존하며 아이들이 스스로 아름답게 꾸려가는 교실을, 교사라면 누구나 꿈꾸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다양한 노력이 학교에서 이루어지고 있는데 아이들이 무언가를 주도하여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수업에서 특히 그런 성격이 도드라진다.


 혁신학교에 근무하다 보니 자율성 민주성 개방성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게 되는데 앞에서 언급한 광고 만들기 수업 같은 것을 진행할 때 특히 고민이 많이 된다. 어디까지 자율에 맡겨야 할 것인가. 민주적으로 의견을 교환한다는 것은 초등학교 수준에서 가능한 일인가 등이 바로 그 고민이다.


 자율에 맡기자니 일이 진행이 안된다. 소란스럽다. 다른 반 눈치가 보인다. 노는 것만 같다. 요령을 피우는 아이들이 보인다. 수업시간을 날려먹고 날로 먹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


 반대로 개입을 하자니 아이들이 말을 하지 않는다. 고요하다. 정적이 흐른다.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는다. 교사의 의지대로 수업을 끌어가는 것만 같다. 혁신학교 정신에 위배되는 것 같다.


 절묘한 균형


 학교에서는 매 순간이 이런 고민의 연속이다. 얼마 전에 한 특강을 들었다. 그 강의를 진행하던 강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래서 학교와 교사는 매 순간 절묘한 균형을 잡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어디까지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가. 교실에는 항상 절묘한 균형이 필요하다고 하는데 그 절묘한 균형의 포인트가 어디인지 경력이 짧은 나는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경력이 늘어난다고 해서 정확한 균형을 잡아낼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내 인생 하나도 균형을 잡기가 힘든데 아이들 사이에서 매번 균형을 잡아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교사로서 가장 큰 부담이 되는 것 같다.


 때로는 그 절묘한 지점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에 학교 구성원 간에 갈등이 발생하기도 한다. 아이들의 생활과 수업에서만 절묘한 지점을 찾을 것이 아니라 교사 간에도 절묘한 지점을 확보해내야 한다.


 이것은 마치 두 명이 타야 균형이 맞는 시소에서 균형을 잡아보겠다고 혼자서 이쪽저쪽으로 뛰어다니는 모습과도 같다. 그렇다고 한다면 시소를 정확히 멈출 수 있는 균형점을 잡아내는 일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인 것 같기도 하다.


 균형감각이 매우 뛰어난 어떤 교사는 정확한 균형점 위에 요가 자세를 하면서까지 서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부분의 보통의 교사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지쳐서 어느 한쪽에 주저앉아 버리거나 균형을 잃어 바닥으로 떨어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균형. 너무도 어렵고 우리의 관념 속에만 존재하며 현실 세계에선 결코 마주할 수 없는 단어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시소의 양 끝을 왔다 갔다 하며 찾기 어려운 균형점을 찾아보려 눈을 부릅 떠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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