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안돼 아빠 다이어트 해야 돼. 각자 할 일 하고 만나서 놀자. 할 일 먼저 끝내고 노는 사람이 멋진 사람이야
아들: 알았어. 근데 나는 뚱뚱한 뚱이 아빠가 좋아
스펀지밥에 나오는 뚱이 캐릭터가 마음에 들었는지 아이는 나를 가리켜 뚱이라 부른다. 아빠를 놀리는 것에 재미를 들린 아이는 본인이 생각하기에 웃긴 캐릭터를 알게 되면 모조리 다 그건 아빠 같다며 깔깔댄다. 아빠는 잠만보야, 아빠는 고라파덕이야, 아빠는 야도란이야, 아빠는 뚱이야. 웃긴 캐릭터에 아빠를 대입시켜 장난치는 것이 재미있어서 그런 것인지 캐릭터 자체가 웃겨서 그런 것인지 아이는 캐릭터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린다. 그랬던 아이가 갑자기 정색을 하며 자기는 아빠가 뚱뚱해도 좋단다. 단순히 아빠의 운동가는 길을 막아 함께 놀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말일 수도 있었겠지만, 그 순간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받은 것 마냥 충만한 기쁨을 느낀다.
인간이라면 인정욕구가 생성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자기 스스로를 인정하거나 타자로부터 인정받거나, 결국 인간은 그 양측의 인정욕구를 적당히 조율해 가며 살아가는 동물이다.그런데불교에서는 해탈을 위해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의 경지라 일컫는다. 인생은 고통의 바다이고 고통은 나로부터 비롯되므로 나라는 존재 자체를 나의 인식에서 제거해야 하는 무아의 경지는 스스로를 인정해야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현대의 행복 논리에반한다. 스스로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자기 인식이 필요한 탓이다. 아이의 말 한마디에 인정받은 듯한 기분을 느끼는 나는 무아의 경지에 도달하기엔 틀렸다. 자식의 인정이라는 가장 강력한 외부의 인정을 내 안으로 들여와 자기 인식을 강화하기 때문이다.
자녀는 가장 냉혹하고 강력한 평가기준을 가진 채점관이다. 그런 자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것은 최고 수준의 인정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이다. 자녀를 키우는 사람이 인정욕구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그래서 몹시 힘든 일이다. 너만큼은 내 삶을 알아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부지불식간에 의식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부처가 되는 일은 글렀으나 한 아이 앞에 실존하는 일은 가능해진다.
나도 그렇게 아이를 대하기로 다짐해 본다. 성에 차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더라도, 결점 투성이인 것처럼 보일지라도,부모 마음에 생채기를 내더라도 그저 존재 그 자체로 인식하기로, 아니 이는 사실 다짐이 필요 없는 일이다. 부모는 본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 탓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