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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플 땐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데

아빠가 아플 땐 왜 옆에 못 가게 해?

by 정 호
엄마: 아들 오늘은 엄마랑 놀자~

아들: 왜?

아빠: 아빠가 오늘 감기 기운이 좀 있는 것 같아서 아들한테 옮을까 봐 그래

아들: 내가 아플 땐 엄마 아빠가 옆에 있는데 아빠가 아플 땐 왜 옆에 못 가게 해?


함께 놀 놀이 친구를 잃어버린 아이는 감기에 걸려 자체 격리 중인 아빠와 놀지 못하는 것이 무척이나 아쉬운 듯 접근금지 명령 앞에 두 발이 묶인다. 자신이 아플 때 자신을 돌봐준 부모에 대한 보은의 마음으로 아빠의 병을 간호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을 테지만, 자신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의 토로를 부모는 또 이렇게 곡해하여 듣고 싶은 대로 듣고는 제 멋대로 감동을 하고 만다.


안타까움이었을까 측은했던 것이었을까. 아이가 아비를 바라보는 마음의 근원은 무엇이었을까. 같이 놀지 못해 안타까운 마음에 몽니를 한번 부려보았던 것일까. 그것은 아니었을 테다. 아이의 응석은 후안무치의 그것이라기보다는 아리따운 앙탈에 가까운 탓에 사랑의 정서를 듬뿍 담은 행위로 보아야 옳다. 간혹 아이의 앙탈이나 투정을 사랑의 정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직 훈육으로 대하는 사람을 볼 때면 그 정서의 을씨년스러움이 느껴져 "아이고" 하는 장탄식을 뇌까리며 서둘러 그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한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늘 옳은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엄격하고 차가운 사랑은 더더욱 제대로 된 결과를 빚어내기에 한없이 부족하기만 하다.


따듯함은 무엇인가. 아이의 말을 근거 삼아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함께 있어주고 싶은 마음, 그런 것이 아닐까. 개인주의의 탈을 쓴 이기주의와 극단적인 기브 앤 테이크가 점차 일반론으로 자리 잡아가는 현시대에, 내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함께하기를 자처하기란 불가능을 기대하는 것에 가까울 정도의 희박한 확률에 의지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따듯함, 대가를 기대하지 않 자기희생적인 따듯함이 갖는 일종의 경건한 마음에 고개를 떨구게 된다. 그것은 숭고한 마음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기르다 보면 가끔 내 마음이 경건해짐을 느낀다. 그것은 일종의 종교적 체험과 비슷하다. 순간적인 어떤 깨달음을 느끼기도 하고, 무어라 형용하기 힘든 마음이 들어 숙연해지기도 하며, 절대적인 진리를 마주한 것 같은 기분에 고양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해해야만 따를 수 있는 것이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삶의 자세라고 한다면 그저 믿기 때문에 따를 수 있는 것은 종교적인 삶의 자세다. 자녀를 가르는 일은 그런 의미에서 과학적 삶이라기보다 종교적 삶에 가깝다. 그저 믿고, 의지하고, 계산하지 않기에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구도자적인 삶에 가깝다. 그렇다 자녀를 기르고 자녀를 대하는 일은 구도의 길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것은 깨달음의 연속이자 고통의 반복이지만 죽는 그날까지 추구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필연적 숙명과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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