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다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아들: 아빠, 지금 왔을까?
아빠: 아니 오늘은 안와, 어제 주문했으니까 내일이나 모레 올 거야
아들: 택배 아저씨가 빨리 와서 오늘 왔을 수도 있잖아
아빠: 그럴 수도 있는데 보통 택배는 2~3일 정도 걸려
아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빠: 기다리기 힘들어?
아들: 응!
아빠: 기다릴 때 그 설레는 느낌이 소중한 거야. 나중에는 그런 기분도 느끼기 힘들어
아들: 아니야 힘들어
아빠: 하루만 더 기다려봐
아들: 그래도 안 오면?
아빠: 그럼 하루를 더 기다려야지
아들: 근데 계속 기다려도 안 오면?
한동안 레고를 찾지 않다가 며칠 전부터 갖고 싶은 레고가 있다길래 아내는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을 선물했다. 어제 인터넷으로 주문을 했으니 집에 도착하려면 넉넉잡아 이삼일쯤 기다려야 할 터였다. 하루 만에 배송이 오기도 하지만 아이의 인내심을 생각할 때, 도착 일정이 미뤄지는 것보다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는 편이 평온하고 행복한 결말을 가져올 것임을 알기에 우리 부부는 "도착하려면 멀었는데?"를 연신 외쳐댔다.
어제 함께 휴대폰으로 주문을 완료한 그 순간부터 아이의 머릿속은 온통 장난감 생각으로 가득 찼는지 어제는 언제 올까? 지금 오고 있나?를 줄기차게 묻더니 오늘은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오늘 오겠지? 오늘 올 거야. 택배 아저씨가 지금 오고 있어?라고 끊임없이 질문을 퍼붓는다. 같은 말을 자꾸 반복하게 하는 것이 귀찮다가도 아이가 얼마나 설레는 마음으로 장난감을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니 아이가 저러는 것도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하고 그 마음을 온전히 누리도록 돕는 것 또한 부모의 할 일인가 싶어서 물어올 때마다 성실하게 답변해 주려 애를 쓰고 있던 터였다. 그렇게 비슷한 질문과 비슷한 대답을 몇 차례 반복하다가, 기다려도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냐는 아이의 말에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머뭇거리게 된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며 때때로 그런 막연함과 불안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것은 하염없이 고도를 기다렸던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가 겪었던 기다림처럼 기다림의 대상이 무엇인지 실체가 명확하지 않아 평생을 허공에 손을 휘젓게 만들기도 하고, 명확한 실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제 그것에 도달할 수 있을지, 아니 도달하는 것이 가능하기는 한 것인지 기약과 확신이 없기 때문에 불안감에 떨기도 한다.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어떡하냐는 아이의 단순한 질문은 생을 관통하는 묵직한 질문이 되어 나에게 날아온다.
"아빠도 몰라"라고 답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지만 아이의 삶이 조금이라도 가벼워지길 바라는 마음에 어떻게 해서든 내가 알고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의 답을 내어주고 싶다. 그런 마음을 품고 고민하는 덕분에 나는 아이와 대화하며 내 생의 답을 조금씩 찾아간다. 아이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정성스레 갈고닦은 생각들이 오히려 내 삶을 단단하게 만들고 삶의 방향을 더욱 또렷하게 비출 때가 많다. 아이 덕에 내가 자라는 셈이다. 질문에 늘 만족할만한 답을 내어줄 수는 없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답을 하려 애쓰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 완벽하지 않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는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내가 너에게 내어주는 대답보다 나의 그런 모습들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정말로 내가 바라는 것은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