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을 꼭 다물고 팔을 내젓는 너를 보며

열정인지 고통인지

by 정 호

"아빠 수영 안 다니고 싶어."


수영장에 다닌 지 두 달쯤 되었을까? 아이는 돌연 수영장에 그만 다니고 싶다고 말한다. 물놀이를 하고, 숨 참는 법을 배우고, 발차기를 하고, 두 손으로 키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고, 한 손으로 키판을 잡고 고개를 돌리며 손을 저으며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는 아이를 보며 그저 대견하고 기특하다고만 생각했다. 호흡이 꼬여 물을 먹고도 울지 않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의 인내심에 대견해하고, 레일 끝까지 어설프게라도 팔을 휘저으며 나아가는 아이를 바라보며 아이의 성실함을 발견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이가 수영을 좋아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아이가 드러내어 보이는 모든 현상을 부모는 자의적인 해석에 따라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은 아닐까. 그저 칭찬이 듣고 싶어서, 부모의 말을 거역할 수 없어서, 남들보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 어쩌면 옆 레일의 아이들이 하고 있으니까 그저 같이 허우적댔던 것에 불과했을지도 모를 아이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부모는 대견하고 기특하고 뭉클하게 바라보았던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과 해석의 간극은 우주의 그것처럼 멀리 떨어져 있어 우리는 평생 그 양측의 얼굴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해석이 사실에 딱 맞아떨어질 때도 있겠으나 꿈보다 해몽일 때가 더 많다. 그 간극의 괴리를 정확히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에 끊임없이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부모는 늘 불안하다. 내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하는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아이를 위한 일인지,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의 모든 과정은 그래서 흐릿하고 위태롭다.


내 인생이라면 기쁨이라는 기준점에 초점을 맞추기라도 할 테지만 아이의 인생은 나에게도 그에게도 그야말로 미지의 영역인 탓에, 기뻐하는지, 힘들어하는지, 핑계인지, 변덕인지 도무지 알 수도 가늠할 수도 없다. 그래서 부모는 늘 고민이 된다. 무리를 해서라도 밀어붙여야 좋을지, 이쯤에서 그만둬야 좋을지. 결국은 아이의 뜻대로 그만두는 선택을 했지만 앞으로 수많은 결정 앞에서 같은 고민을 반복해야 할 것을 생각하니 그 무게감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아이의 뜻대로"라는 허울 좋은 말속에 숨어있는 무책임함을 수도 없이 목격했다. "부모 욕심"에 망가지는 아이들 또한 무수히 목격한다. 내 인생의 선택지 앞에서도 주춤거리며 나아가기 바쁜데 아이 인생의 선택지는 그보다 훨씬 무겁다. 조력이 될지 훼방이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잘했구나" 혹은 "그때 잘못했구나"를 반복하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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