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제 선해질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 운전할 때는 방향 지시등이 쓸모가 없어. 우측 깜빡이를 넣으면 우측 차들이 되려 속도를 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성미가 급하다. 그것은 여러 장점을 도출해 내는 바탕이 되지만 때로는 혈압 오르는 상황을 서로에게 선사하기도 한다. 운전할 때가 바로 그런 상황인데 한국인의 급한 성미는 자동차 핸들과 만나는 순간 극대화된다. 신호 대기를 하고 있다가 초록불로 바뀐 지 1초가 채 되지 않아 뒤에서 빵빵대며 울려대는 경적음, 고속도로에서 여유 있게 미리 차선 변경을 해두지 않고 톨게이트로 빠지기 위해 급하게 차선변경을 하는 위험천만한 상황, 주차장이 레이싱 로드라도 되는 듯 악셀에 힘을 줘 부릉부릉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사각지대에서 갑자게 튀어나오는 갑툭튀, 조금만 걸어가면 주차자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집 가까운 곳에 주차하기 위해 이중주차하는 뻔뻔함. 자동차의 뒷모습만 봐도 한국인이 운전하는 것 같은 느낌을 알아챌 수 있다는 어느 유학생의 말은 과장이 아니었음을 매일 실감한다. 오죽하면 깜빡이는 페이크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을까.
해외여행 경험이 많지 않아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하와이와 괌에 여행 갔을 때 운전하며, 그리고 신호등 앞에서 놀라움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것은 불쾌함을 유발하는 놀라움이 아니라 경외감에 가까운 놀라움이었는데 이제껏 한국에서는 매우 드물게 경험할 수 있었던 여유로운 운전자들의 모습 때문이었다. 급하게 차선변경을 하는 차도, 주차장에서 레이싱을 하는 차도 없었을뿐더러 여행기간 내내 자동차 경적음을 단 한 번도 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호등을 건널 때면 미소를 장착한 채 손을 흔들거나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국토 면적 대비 인구수가 많기 때문일까. 인구 밀집도가 높아 양보를 했다간 내가 몇 분 손해 볼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일까. 그런 손익계산의 근원은 세계최고의 경쟁사회에서 평생을 살아왔기 때문일까. 경쟁에서 지면 안된다는 생각이 운전을 하는 사람의 무의식에서도 작동하는 것일까.
인구 밀집과 경쟁적 사고는 한국인으로 하여금 집단적 피해의식을 발생시킨다. 저놈이 나를 제치려고 한다는 피해의식, 양보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 우리나라는 각자의 피해의식이 층층이 포개어져 서로가 서로를 짓누르며 살아가는 기괴한 사회다. 이런 강퍅함은 우리 사회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쳐도 이웃끼리 인사하지 않게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심 때문일 수도, 사생활에 대한 개입을 달가워하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먼저 인사를 해도 스윽 쳐다보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을 가끔 마주하다 보면 이것이 단순히 경계심과 사생활침해에 대한 예방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인사는 아랫사람이 먼저 해야 맞는 것이고 윗사람이 먼저 인사하는 것은 체면치레에 어긋난다는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은 결코 먼저 인사하지 않는다. 자신보다 어려 보이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그렇다.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했을 때 "네~"라고 답하는 사람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데 이는 서로 간에 인사하는 것이 아니라 한쪽의 인사를 한쪽이 받는 양상에 가깝다. 이는 갑질의 변형이다. 아이들의 인사성 부재는 그런 부모들로부터 대물림되었을 테니 근거를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먼저 인사하면 손해 보는 것 같은 느낌, 결코 손해 볼 수 없다는 생각, 이 역시 피해의식이다.
인간은 언제 선해질 수 있는가. 영화평론가 이동진이 인용한 어느 논문에 따르면 인간이 선해질 수 있는 객관적이고 가장 유효한 근거는 여유라고 한다. 인간이 선해지고 악해지는 것은 종교와도 본성과도 큰 상관관계가 없으며 그저 여유 있는 사람이 선해지고 여유 없는 사람이 악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말은 씁쓸한 뒷맛을 남기지만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사회 전반에 만연한 갑질, 을질, 병질은 스스로 피해자가 되고 싶지 않다는 악에 바친 모두의 발광이다. 어떤 시스템이, 그 시스템 속에 어떤 사람들이 이렇게 우리 모두를 피해자로 몰아가고 있는 것인가. 손자병법에는 위사필궐이라는 전략이 나온다. 적을 포위하더라도 반드시 도망갈 길을 터주라는 의미인데 퇴로가 막힌 군인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기 때문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살기 위해 고양이를 물 수밖에 없는 일이다. 모두가 막다른 길에 몰려있는 것처럼 느끼며 살아가는 피로한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물어 죽이려 할 뿐이다. 선해지기 위한 한 줌의 여유를 어디에서 찾아낼 것인가. 어쩌면 스스로 여유를 찾으려는 현시대의 필사적인 노력은, 보다 나은 사회로 도약하려는 최선이자 최후의 발버둥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