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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 호 Nov 25. 2020

평등은 실현 가능한가

모든 것이 동등하다면 가치와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생님 우리 반은 왜 안 해요?


담임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본 교사라면 이 발언이 내포하고 있는 공격성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피로감, 그리고 본인의 학급경영 철학에 대해 밀려오는 회의감을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을 상상할 수 없듯 학급을 꾸려가는 교사 역시도 각자의 개성을 가진 존재이기에 이런 개별적 존재인 교사가 꾸려가는 각각의 학급은 분위기나 학급 프로그램, 수업 진행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고 그러한 다양성을 양분 삼아 아이들은 성장해나간다.


같은 교과, 같은 단원, 같은 주제를 두고도 교사에 따라 수업방식은 강의식, 토론식, 팀 티칭, 모둠별 운영 등 다양하게 달라질 수 있으며,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예산이 주어진다면 담임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혹은 우리 반 학생에게 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에 따라 서로 다르게 예산을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강의식 수업이라고 무조건 구시대적인 방식이 아니며 토론식 수업이라고 아이들의 상호작용이 늘 활발히 촉발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교사는 아이들의 예체능 경험에 힘을 쏟을 수도 있고 어떤 교사는 아이들의 외부체험에 힘을 주는 학급을 경영하고자 마음먹을 수도 있다. 학생들의 생일파티나 소소한 선물을 구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교사도 있고 차라리 그 돈으로 책을 사서 아이들의 마음에 울림을 주고자 노력하는 교사도 있다. 주어진 예산은 한정적이고 운영하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어떤 부분에는 조금 더 투입이 되고 어떤 부분에는 조금 덜 투입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똑같은 학교나 학급은 존재할 수 없다. 사람이 하는 일이고 한정적인 자원을 나누는 일이기에 그렇다.   


학교에서 일을 하고 있기에 학급을 예로 들었지만 평등이라는 탈을 쓴 불만의 소리는 우리의 삶 곳곳에서 터져 나온다. 무조건적인 평등이 갖는 위험성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기 위해 여기 한 예를 소개하도록 한다.


미국의 한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경제학 교수가 있었다. 그는 평소 학점이 후한 것으로 유명했는데 한 학기는 학생들과 평등에 대해 논의하던 중 수강생 전원이 F를 받게 되는 사태가 발생한다. 교수는 경제학 교수답게 지나친 복지 정책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몇몇 학생들이 교수의 생각이 틀렸다며 반박을 한다. 교수는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알아보기 위해 한 가지 실험을 제안한다. 이번 학기 동안 몇 번의 시험을 치른 후 각 시험마다 수강생 전원의 평균 점수를 내어 모든 수강생에게 그 평균점수로 똑같이 성적을 매긴다는 것이다.


시험을 치르면 치를수록 열심히 하는, 혹은 능력이 뛰어난 학생들은 불만을 갖게 되었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열심히 하지 않는, 혹은 능력이 부족한 학생들과 평균을 내어 점수를 받는 것이 불합리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학기 말에 가서는 열심히 하던 이들조차 더 이상 공부를 하지 않아 전체 학생이 F학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열심히 하지 않던, 혹은 능력이 부족해서 열심히 하더라도 성적이 나오지 않던 학생들은 결과에 만족했을까? 애석하게도 이들 역시 F학점에 대해 불만을 품고 학기를 마무리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성적이 잘 나오는 친구들 덕분에 그럭저럭 B나 C 정도로 만족을 했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성적이 잘 나오는 친구들조차 포기하는 것을 보고, 나는 능력이 부족해서 못했지만 너희는 잘할 수 있으면서 왜 열심히 하지 않아 평균점수를 내려가게 만드느냐며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교수는 이것이 자본주의의 본성이며 무조건적인 복지제도의 한계라는 점을 지적했다. 보상이 있는 곳에 노력과 성과가 따르는 것이며 무상복지의 결과는 퇴행과 후퇴만을 낳는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극단적인 실험 상황이기도 하고, 교수의 말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마이클 샌델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상태로 태어날지 모르고 언제든 약자의 상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반드시 복지라는 보험을 세팅해두어야 하며 그것이 국가가 해야 할 의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부자보다 빈자가 필연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는 자본주의의 구조상 마이클 샌델 교수의 이런 주장이 정의의 타이틀을 가져가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듯 보인다. 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이나 성취를 통해 나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때때로 지나친 복지와 지나친 과세는 앞으로 나아가려는 동력을 빼앗는 일이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동등해진다면
가치와 의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분명한 것은 모든 것이 동등해진다면 더 이상 가치와 의미를 갖는 것은 아무것도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는 점이다. 사람은 누구나 가치로운 것, 의미 있는 것을 성취하고자 할 때 뛰게 된다. 가만히 있어도 입에 밥을 넣어주는 세상. 더 이상 의미를 찾기 힘들어진 세상 속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란 불가능한 일은 아닐까.


마이클 샌델 교수 역시 여러 가지 정의에 대해 나열하고 있지만 결국 이것이 정의다!라고 명확하게 이야기하지 않고 우리에게 선택권을 넘겨주었듯, 입장에 따라 각자의 정의는 달라진다. 그래서 책 제목도 정의란 무엇이냐고 묻고 있지 않은가. 세계적 석학 역시도 답을 내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것을 보면 어쩌면 삶이란 끊임없는 질문에 대해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라는 말이 정답인 것 같기도 하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은, 인생에 답이 없으니 우리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확립해가야 한다는 다짐이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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