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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쓸 만한 인간

적당해진 인간

by 정 호

1987년생으로 2011년에 파수꾼으로 데뷔하였으며 2013년부터 남들에게 보이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는 배우 박정민. 그를 처음 배우로서 인식하게 된 것은 황정민, 유준상 주연의 영화 전설의 주먹에서였다. 그 후 동주를 보며 깊은 인상을 받았고 시동, 변산, 타짜를 보면서 그가 주로 그려내려는 캐릭터에 대한 색깔을 내 멋대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것만이 내 세상을 통해 그의 성실함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피아노를 전혀 칠 줄 모르는 사람이 몇 개월 연습해서 그렇게 연주를 해낼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자신의 영역이 아닌 곳에서조차 마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인 것처럼, 재능조차 연기해 내는 그의 성실함에 입이 벌어졌다. 그렇게 배우 박정민의 존재는 내 머릿속에 완전히 각인되었다.


어떤 배우는 데뷔 순간부터 그의 존재를 인식하게 되어 그의 필모그래피를 시간 순으로 쭈욱 따라가며 그의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동시에 그와 함께 늙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 배우가 있는가 하면 어떤 배우는 이미 데뷔한 지 꽤 된 이후에 알게 되어 그의 작품을 뒤죽박죽 감상하며 아 예전에는 이런 모습도 있었구나, 우와 이렇게 변했구나, 하며 그 사람의 시간의 흐름과는 전혀 무관하게 한 인간의 모습을 공간적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박정민의 경우는 나에게 후자에 해당하는데 그의 작품을 뒤죽박죽 감상하고 있으며 특히 데뷔작이었던 파수꾼을 가장 최근에 감상했다는 것이 그 이유라면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


그가 작품활동을 할 때면 공교롭게도 미디어는 항상 비슷한 지점을 조명하곤 한다. 피아노를 쳐본 적이 없는 사람이 피아노를 배웠다더라. 이번에는 랩을 연습해서 실제 래퍼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랩을 연습했다더라. 이번에는 여장을 하고 영화에 나온다더라. 그가 빛을 발하는 분야는 성실함이다. 연기인 줄 알면서도 관객들이 몰입하게 되는 이유는 연기가 연기로 보이지 않고 "진짜"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어색한 cg 앞에서 관객들이 코웃음을 치듯 연기가 연기로 보이는 즉시 관객은 몰입할 수 없게 된다. 박정민의 성실함은 연기를 진짜처럼 만들어내는 최고의 재능이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그리고 그가 쓴 이 책에서도 배우 박정민은 자신이 배우로서 가진 재능은 뛰어난 외모도, 훤칠한 기럭지도, 돋보이는 스타성도 아닌 그저 묵묵한 성실함뿐이라고 강조하는데 이 성실함이야말로 어떤 분야에서건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잠시 반짝했다가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키며 세월이 지날수록 점점 더 밝게 타오르며 그 빛을 발하는 존재로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그의 성실함에 대한 호기심, 글을 재미있게 쓴다는 다른 배우들의 추천을 보며 그가 쓴 글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언제나 좋은 팀에 속해 있을 수는 없어도 언젠가 좋은 팀에 속해 있을 수는 있을 거다. 138

"잘 들어라" 연기를 배우며 처음 배웠던 것이다. 듣지 않는 세상, 고독한 세상, 혼자만의 아집에 갇혀버린 세상, 모두가 귀를 닫고 입만 여는 세상. 157p

살인범에 관한 기사를 쓴다고 칩시다. 겉으로 드러난 사실만 봤을 때는 살인범이 아주 죽일 놈일 수 있겠죠. 하지만 이면의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야기는 달라져요. 언론이 경계해야 할 것도 이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봐요. 단편적인 사실만 나열하게 되면 오히려 진실과 멀어질 수 있어요. 176p

문학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 어떤 사실보다 진실에 가깝다. 단편적인 사실보다 그 너머의 진실을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겠죠. 177p

그의 글은 적당히 유쾌하고 적당히 진지하다. 물론 이 적당히라는 단어가 박정민의 내면세계와 삶을 대하는 자세를 대변할 리 없겠지만 적어도 이 책만큼은 그렇다. 그리고 그의 진지함과 유쾌함이 따듯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챌 수 있다. 따듯하지만 따듯함을 드러내기가 부끄러운 사람, 유쾌하고 싶지만 마음껏 유쾌해지기도 어려운 사람. 그는 그래서 진지함과 유쾌함 사이를 횡단하며 조심스레 자신만의 방식으로 미지근한 생각과 배려를 글과 작품에 담는다. 미지근하다고 해서 그것이 언제나 어설픔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의 미지근함은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질 수 있는 잘 제련되고 정돈된 안정감 있는 상태에 가깝다. 그가 끝없이 사색하고 끝없이 자신을 탐구했으면 좋겠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바라볼 수 있는 배우가 생겨서 기쁜 마음이다.


그가 글에 녹여낸 청소년 시절 즐겨 들었을 법한 노래가사들이나 여러 예시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확실히 나와 동년배가 맞다는 것이 느껴진다. 사회에 나온 이후 동갑내기 친구를 만나기 어려운 탓일까. 나이가 같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부쩍 여러 단계를 건너뛴 듯한 기분이 든다. 그의 적당한 시니컬함과 적당한 유머러스함이 좋다. 그리고 그 적당함이 치열한 고민과 사색의 결과라는 것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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