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
거리에 인적이 보이지 않는다. 눈 닿는 이차선 도로 어디에도 차량이 다니지 않는다. 움직이는 것은 믿을 수 없이 느리게 떨어지고 있는 함박눈뿐이다. 허공을 가득 메운 눈송이들 사이로 선홍색 신호등이 켜진다. 버스가 횡단보도 앞에 멈춰 선다. 젖은 아스팔트 위로 눈이 내려앉을 때마다 그것들은 잠시 망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 그래야지...라고 습관적으로 대화를 맞는 사람의 탄식하는 말투처럼, 끝이 가까워질수록 정적을 닮아가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누군가의 어깨에 얹으려다 말고 조심스레 내려뜨리는 손끝처럼 눈송이들은 검게 젖은 아스팔트 위로 내려앉았다가 이내 흔적 없이 사라진다. - 작별하지 않는다 89p. -
처음에는 새들이라고 생각했다. 흰 깃털을 가진 수만 마리의 새들이 수평선에 바짝 붙어 날고 있다고. 하지만 새가 아니다. 먼바다 위의 눈구름을 강풍이 잠시 흩어놓은 것이다. 그 사이로 떨어진 햇빛에 눈송이들이 빛나는 것이다. 해수면이 반사한 빛이 거기 곱절로 더해져, 흰 새들의 길고 찬란한 띠가 바다 위로 쓸려 다니는 것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거다. 59p
흰 털실로 뜬 모자를 쓴 것처럼 그녀의 머리에 눈이 쌓였다. 파카 호주머니에 찔러 넣은 내 두 손은 딱딱하게 얼어 있었다. 우리가 눈 위로 발자국을 남길 때마다 소금 부스러지는 소리가 났다. 95p.
눈의 속력은 이제 더 느려졌다. 속력에 반비례하는 듯 눈송이들은 더 커지고 촘촘해졌다. 장갑을 벗고 속눈썹에 내려앉은 눈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닦을 때마다 눈언저리가 젖는다. 시야에 잡히는 모든 것이 어른어른 번져 보인다. 허리를 굽혀 운동화 위로 쌓인 눈을 털어내자 목이 짧은 양말 속으로 차고 축축한 눈송이들이 스며 들어온다. 106p
앞문이 열린다. 히터가 틀어진 차내의 축축한 공기가 밀려 나와 코끝에 닿는다. 면장갑 낀 손으로 변속기 레버를 쥔 운전기사가 노인에게 묻는다. 118p
커다란 광목천 가운데를 가윗날로 가르는 것처럼 엄마는 몸으로 바람을 가르면서 나아가고 있었어. 310p
기온이 조금만 더 높았다면 폭우로 퍼부었을 밀도의 눈이다. 107p
가편집을 마친 인선이 가까운 지인들을 불러 모아 예비 시사를 한 영화에서 그 폭우의 장면은 '좋아, 내가 이야기해 줄게'라고 대답했던 노인의 일상 다음에 배치되어 있었다. 108p
눈처럼 가볍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그러나 눈에도 무게가 있다. 새처럼 가볍다고도 말한다. 하지만 그것들에게도 무게가 있다. -109p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134p
다섯 살의 내가 K시에서 첫눈을 향해 손을 내밀고, 서른 살의 내가 서울의 천변을 자전거로 달리며 소낙비에 젖었을 때, 칠십 년 전 이 섬의 학교 운동장에서 수백 명의 아이들과 여자들과 노인들의 얼굴이 눈에 덮여 알아볼 수 없게 되었을 때, 암탉과 병아리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닭장에 흙탕물이 무섭게 차오르고 반들거리는 황동 펌프에 빗줄기가 튕겨져 나왔을 때, 그 물방울들과 부스러지는 결정들과 피 어린 살얼음들이 같은 것이 아니었다는 법이, 지금 내 몸에 떨어지는 눈이 그것들이 아니란 법이 없다. 136p
그렇게 죽음이 나를 비껴갔다. 충돌할 줄 알았던 소행성이 미세한 각도의 오차로 지구를 비껴 날아가듯이. 반성도, 주저도 없는 맹렬한 속력으로. 15p
그때 돌아보지만 않으면 자유인데... 그대로 산을 넘어만 가면. 240p.
엎드려 고개를 숙이기 전에 나는 자신에게 묻는다. 이것을 보고 싶은가. 병원 로비에 붙어 있던 사진들처럼, 정확히 보지 않는 편이 좋은 종류의 것 아닐까. 256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