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프게도 길이길이 남을 것만 같은 인류의 고전
'안정된 사회'라는 것이 존재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사회가 급격히 혼란스러워지거나 기술의 발달로 점차 개인의 사적 영역이 여러 방식으로 침범당하는 시대를 살아가며 우리는 어떤 '불안'을 느낀다. 그 불안은 점차 인간에게 혼란을 가져오게 되고 종국에 가서는 공포와 무관심을 바탕으로 '순응하는 자'가 되거나 오히려 정 반대의 영역인 '깨뜨리는 자'로 인간을 변화시킨다. 물론 이 확고한 종착지에 도달하기 전에 '눈치 보는 자'라는 과도기를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빅 브라더, 학창 시절부터 무수히 들어온 그 유명한 단어의 출원지인 1984를 드디어 읽었다. 1984는 무려 1949년도에 35년 이후라는 미래 사회를 설정하여 발표된 소설인데 소설에 쓰인 여러 기술적인 요소들이 당시에는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미래소설로 읽혔고 정치적, 체제적인 요소로 인해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을 법도 하다. 실제로 발간 이후 소련에서는 1988년까지 금서목록으로 지정되었고 2022년에 친러 독재국가 벨라루스에서도 1984를 금서로 지정했다는 소식이 있었다.
고전은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화두를 던진다. 1984 역시 고전답게 책이 발행된 1949년 이후 2025년인 현재에 이르기까지 어느 시대에 읽어도 각 시대의 문제를 꿰뚫는 통찰을 담고 있다. 1984는 '집단속에서 개인은 어떤 형태로 존재하게 되는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소설의 절대악 빅 브라더는 책이 끝날 때까지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그것의 실존여부를 독자들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은 빅 브라더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 무섭도록 단단한 믿음 앞에서 공포와 좌절과 무력감은 한 인간이 개인으로 존재할 수 없도록 모든 정신적 신체적 움직임의 자발성을 앗아간다. 그렇게 그들은 통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심지어 자유롭게 살고 있다는 착각에 빠진 채 자유 의지를 잊는다.
엘리베이터 맞은편 벽에 붙은 커다란 얼굴의 포스터가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은 사람이 움직이는 대로 눈동자가 따라 움직이도록 고안된 포스터였다. 포스터 아래에는 '빅 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라는 글이 적혀 있었다. 10p
방 안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무쇠 생산과 관계되는 무언가 숫자로 이루어진 목록을 읽는 소리였다. -중략- '텔레스크린'이라는 그 금속판은 소리를 줄일 수는 있어도 완전히 끌 수는 없게 되어 있었다. 10p
늘 우리를 감시하고 있는 존재,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끊임없이 명령을 내리는 어떤 존재, 심지어 그의 음성이 내면화되어 내 옆에 실존하지 않아도 나의 영혼 뿌리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내 선택의 모든 순간에 간섭하는 현상. 이것은 명백히 통제를 위한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의 결과는 분명히 개인의 자아를 말살한다.
면도날은 이제 '자유'시장에서 남몰래 구걸하다시피 해야 겨우 구할 수 있었다. 70p
원칙적으로 당원은 여가를 누릴 수 없는 데다 잠잘 때를 제외하고 절대 혼자 있어서는 안 되었다. 일하거나 식사하거나 잠잘 때 외에는 단체 오락 활동에라도 참가해야 했다. 어떤 것이든 고독한 낌새를 내비치는 행위를 하거나 하다못해 혼자 산책을 하는 것조차 위험한 짓이었다.
면도날은 왜 구하기 힘든 물건이 되었을까. 면도란 어떤 행위인가. 면도를 하려면 정면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눈을 떼지 않고 자신을 들여다보며 손에 적정한 힘을 줘서 털을 밀어내야 한다. 이는 메타인지를 사용해야 함을 뜻한다. 하지만 당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오세아니아에서 생각에 대한 생각인 메타인지는 필요하지 않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말살되어야 하는 것이며 발각될 시 사상경찰에게 잡혀갈 만큼 위험한, 사회와 체제를 위협하는 위법행위로 간주된다. 따라서 완벽한 독재국가이며 완벽에 가까운 통제가 실현된 오세아니아에서는 국민들이 '고독'해질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다. 고독과 사색의 낌새를 풍기는 것 역시 위법행위에 해당한다.
"자네는 신어를 만든 목적이 사고의 폭을 좁히는 데 있다는 걸 모르나? 결국 우리는 사상죄를 범하는 것도 철저히 불가능하게 만들 걸세. 그건 사상에 관련된 말 자체를 없애버리면 되니까 간단하네." -중략- 사실상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사상 따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걸세. 정통주의는 생각하지 않는 것, 생각할 필요도 없는 걸 뜻하네. 요컨대 정통주의란 무의식 그 자체일세. 74p
비트겐슈타인은 나의 언어의 한계가 나의 세계의 한계라고 말한 바 있다. 즉 언어가 확장될수록 실존하는 세계를 더욱 면밀히 바라볼 수 있게 되고 언어의 폭이 좁을수록 같은 것을 보더라도 실제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가능성이 있는 셈이다.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일제는 일본어를 교육하는데 공을 들였고 한글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통제하였으며 조선시대 연산군 역시 백성의 지성을 제약하기 위해 훈민정음 사용을 금지한 바 있다. 인간의 사유를 작동시키는 도구인 언어를 통제함으로써 인간 내부에서 발생하는 사상적 자유를 박탈한 셈이다. 그것이 그토록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문학이 아니면 무엇이 이토록 생생하게 전달할 수 있으랴.
그건 단지 소극적인 것보다는 적극적인 편을 택했으면 하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어. 하지만 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이야. 189p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삶을 대하는 자세를 알 수 있다. 질 것이 뻔히 보이더라도 보다 적극적인 행위를 벌여 더 나은 패배를 하겠다는 것, 이는 어쩌면 빅 브라더가 도래한 시대에 누구나 빠져들 수 있는 회의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이었을 테다. 소멸되고 날조되고 짓이겨진 과거, 과거가 없기에 미래를 기대할 수 없고 현재의 삶에 끊임없는 의구심을 품고 공허한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한 인류, 그들 중 일부 자각한 자들, 다시 말해 골든스타인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살아보겠다고 다짐하는 윈스턴 같은 사람들은 통제되고 거세된 삶에 대해 반감과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는 것이 필연적 패배를 불러올 것을 직감하지만, 그럼에도 그렇게 몸부림쳐보는 것이 조금은 더 나은 선택일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 아래 윈스턴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저항하기 시작한다.
문득 영화 오블리비언이 떠오른다. 영화의 주인공 잭 하퍼(톰 크루즈)는 1984의 윈스턴 스미스처럼 자신이 통제된 상태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지 못한다. 심지어 잭 하퍼 곁에서 그를 조력하는 여주인공의 이름도 줄리아인데 1984에서 윈스턴 스미스의 곁을 지키는 인물의 이름 역시 줄리아인 것이 재미있다. 영화 오블리비언의 감독이 1984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일까. 잭 하퍼는 어느 시점부터 기억을 잃고 과거를 잊고 체제에 순응하며 살아가다가 우연한 계기로 각성하기 시작한다. 그의 영혼이 되살아난 계기는 책이고 1984의 윈스턴 스미스가 저항하기 시작한 것도 일기를 쓰면서다. 오블리비언과 1984 두 작품 모두 통제 주체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안전한 장소를 외딴 원두막과 허름한 주택이라는 공간으로 설정한 것, 골든스타인과 저항군이라는 반체제 세력이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블리비언은 망각이라는 뜻인데 제목 역시 사유와 이성을 잃은 채 살아가는 주인공의 모습을 묘사함으로써 1984의 인류와 공통점이 있다. 두 작품의 공통점을 생각하며 감상하는 것도 재미있는 관전 포인트가 될 듯하다.
끝없는 숙청, 체포, 고문, 투옥, 증발 따위도 실제로 범한 죄에 대한 처벌로써 가해지는 게 아니라 단순히 언젠가 죄를 범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조치다. 289p
예술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그것들은 삶을 관통하는 이야기를 통해 인류에게 어떤 통찰을 전달한다. 예술과 철학과 과학은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듯 하지만 궁극적으로 인간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맥이 통하는 지점이 있다. 그래서 인간은 서로가 서로에게 빚지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로부터 말을 배우고 모든 외부 환경을 흡수하며 자신의 것을 만들어 남에게 전해주고 남의 것을 또다시 받아들이며 자신의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984는 많은 예술 작품의 영감의 원천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언젠가 죄를 범할지도 모르는 사람을 미리 발견해 선제적으로 제거한다는 발상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핵심 콘셉트이다. 그리고 마이너리티 리포트는 또 다른 어떤 사람의 '사유'에 가 닿아 사색의 시간을 거쳐 새로운 무언가를 창조하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인간은 서로 맞닿아 영향을 주고받고 있으며 그것은 곧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소통하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1984가 던지는 큰 화두 가운데 하나는 과거와 현재의 연결성이다. 빅 브라더, 혹은 필요에 의해 빅 브라더를 창조해 낸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죄, 그 죄의 망령이 두려워 거짓과 날조로 자신의 현재를 끊임없이 뒤덮으며 살아간다. 그들은 과거를 끊임없이 조작 은폐한다. 그래야만 스스로 원하는 미래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자연스러운 연결이 될 수 없다. 이것은 분절을 뜻한다. 파쇄된 종이를 아무리 애써 이어 붙여 본다 한들, 인쇄된 글씨를 자연스레 읽어 내려갈 수 없다. 이는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거짓은 무용하며 언젠가 반드시 그 모순이 드러나게 마련이다.
그는 지하철역까지 그녀를 바래다줄 작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추위에 떨면서 그녀를 졸졸 따라가는 것이 실없고 참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줄리아로부터 떨어지고 싶어서 그런 생각이 든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체스넛트리 카페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일었기 때문이었다. 그때처럼 그곳이 매력 있게 생각된 적은 없었다. 신문과 체스보드, 그리고 항상 술이 있는 그 구석 자리의 탁자가 그리웠다. 무엇보다 그곳은 따듯할 것 같았다. 405p
체제 전복에 대한 희망을 품었던 젊은이의 바스러짐을 처절하게 표현한 1984의 마지막 장은 비극적이며 지극히 현실적이다. 고통과 위협 앞에 사랑과 희망과 인내는 얼마나 무기력하게 와해되는가. 누가 윈스턴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끔찍한 신체적 고문과 정신적 압박을 경험한 윈스턴은 결국 줄리아를 배신하고 만다. 세월이 흘러 우연히 줄리아를 만나게 되지만 이미 그의 가슴속에서 뭔가가 죽었고, 불타 버렸으며, 마비되어 버린 것을 스스로 인지할 뿐이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이 부질없게 느껴지고 신문(입맛에 맞는 가짜 정보), 체스(간단한 유희), 술(망각)이 늘 준비되어 있는 구석 자리(주변인)의 탁자를 보유한 체스넛트리 카페가, 따듯하고 아늑한 그곳이 몹시도 그리워질 뿐이다.
그렇게 우리는 책을 덮으며 호기로운 영웅의 승리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이어서 끔찍하게 무서운 디스토피아를 인식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이야기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과 막막함에 몸서리치게 된다. 판옵티콘, CCTV, 신용카드, 블록체인, GPS, 오블리비언, 트루먼 쇼, 마이너리티 리포트, 아일랜드, 가타카, 브이 포 벤데타, 이퀼리브리엄, 메트릭스, 많은 것들이 떠오른다. 1984는 100년 뒤에도 고전으로서 그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을 것 같다는 불편하고 찝찝한 마음이 든다.